[김국헌의 직필] 일본 탓하기 전 우리부터 반성해야

왕조시대 조(祖)는 왕조의 창건 또는 전란에서 나라를 지킨 임금에 추증하였다. 선조는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지켰다(?)고 한다. 인조는 병자호란에서 나라를 지켰다(?)고 한다. 그러면 순조는 무슨 공이 있었는가? 홍경래란에서 사직을 구했다(?)고 한다. 민중이 들고 일어난 데서 사직을 지켰다는 것이 그렇게 장한가? 조선은 이때 일대 쇄신을 했어야 했다. 그러나 순조에서 헌종, 철종에 이르기까지 60년의 안동 김씨, 조대비의 풍양 조씨, 민비의 여흥 민씨의 외척세도로 민생은 도탄에 빠졌고 일본의 침략에 저항할 기력을 탕진했다.

순조를 이은 헌종은 겨우 8세였고, 헌종이 재위 15년, 23세에 후사 없이 세상을 뜨니 강화도령이 뒤를 이었다. 임금은 주색과 비만으로 심신이 허약하고 후사(後嗣)를 결정하는 대비의 뒤에서 외척들은 국권을 농단하며 부패와 탐학은 극에 이르렀다.

중국이 군자, 일본은 사무라이를 받들었다면 조선은 선비의 나라임을 자랑스러워 했다. 그러나 정몽주, 안향, 이색, 김종직, 조광조를 잇는 선비의 전통은 이조 중기까지다. 임진왜란은 임금뿐만 아니라 선비 모두의 책임이었다. 곽재우, 조식 등이 이끈 의병은 선비들의 맥이 겨우 살아난 것이다. 왜군을 물리친 것에 의병과 이순신의 공이 70이라 한다면 명군의 도움은 30이었다. 그러나 선조와 양반들은 명이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베풀어 조선을 구한 것으로 받들고 명이 청에 멸망한 후에도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했다. 의병과 이순신에 나라를 구한 공을 돌리면 자신들의 무능과 무책임이 발가벗겨지기 때문이었다.

폐모살제(廢母殺弟)를 구실 삼아, 임진왜란에서 분조(分朝)를 이끈 광해군을 몰아낸 서인, 이후의 노론정권은 청이 강희제-옹정제-건륭제의 극성기를 열고 일본이 덕천막부(德川幕府) 영주들의 경쟁으로 번성하는 동안에 조선을 뼈골까지 멍들게 만들었다. 결과는 삼전도의 삼궤구도(三?九叩)였다.

정조와 정약용으로 대표되는 잠시의 번성기는 정조가 석연치 않게 급서(急逝)함에 따라 힘을 잃었다. 이래로 조선의 국세는 하향일로(下向一路), 조선은 개항 이전 이미 일본의 적수가 아니었다. 홍경래는 동학혁명 이전 최대의 민란이었음에도 국정은 전혀 쇄신되지 않았다. 서북인은 한국 사회에서 더욱 철저히 배제되었다. 남북한의 진정한 통합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남북한의 간극(間隙)이 비단 1945년 남북분단이 아니라, 18세기까지 뿌리가 올라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북한의 인권상황은 나치 독일의 유태인 학살, 스탈린의 굴라구와 같은 목불인견(目不忍見), 인류 역사상 최악의 참극이다. 김일성 왕조의 척족(戚族), 권속(眷屬) 수백명 이외에, 북한동포에게는 하루하루가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다. 북한 인권법이 통과되지 못하고 있는 오늘의 남한의 정치상황은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다. 남북의 분단은 일제에 국권을 침탈당한 당한 업보요, 일제에 먹힌 것은 외척, 선비들의 탐학으로 민생이 도탄에 빠져서 국력이 조직, 동원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본을 탓하기 전에 자신부터 반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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