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길의 편집력 시대 ⑨] 안락에 길드는 순간 위기는 온다

명장 손무가 남긴 승병선승이후구전(勝兵先勝而後求戰) 화두는 손자병법의 최고 메시지다. 승리하는 군대는 먼저 승리를 만들어 놓은 이후에 전쟁을 치른다. 정확하게 판세를 분석하고 미리 내실을 다져 결정적 순간을 기다리는 승부의 세계를 간파한 것이다. 사진은 영화 <적벽대전>의 한 장면


‘편집의 직관’ 담긴 동양고전…‘토끼의 굴’ 지혜

박재희 민족문화콘텐츠연구원장은 논어·장자·손자병법 등 동양고전을 현대인들의 입맛에 맞게 재해석해주는 능력이 뛰어나다. 그가 2010년 출간한 <3분 고전>에서 인생 편집의 직관이 절절이 담긴 몇몇 화두를 만나본다. 그가 뽑은 구절 중에서 콕 다가온 최고의 키워드다. 한문으로 된 동양적 메타포는 언제든 되새김질 해도 감칠맛이 난다. 하루하루 일상의 과업에 심신이 버거울 때 잠시 짬을 내어 동양 인문학의 바다 속을 유영해보면 어떨까.

불가승자 수야, 가승자 공야(不可勝者 守也 可勝者 攻也)
이길 수 없는 상황에서는 수비하고, 이길 수 있는 상황에서 공격하라
손자병법 군형편

리더가 개인적인 분노에 못 이겨 급하게 재촉하면 그의 군대는 수모와 패전을 당한다. 전쟁은 국가의 존망과 장병들의 생사를 결정짓는 중대사다. 나아감과 물러감, 우회함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빠르게 전환돼야 한다. 명분에 사로잡혀 조직의 에너지와 사기를 소진해서는 안 된다. 백번 이기는 것도 좋지만 백번 모두 지지 않는 전쟁을 도모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감정과 분노와 기개로만 채워진 판단은 후유증을 남긴다.

명장 손무가 남긴 승병선승이후구전(勝兵先勝而後求戰) 화두는 손자병법의 최고 메시지다. 승리하는 군대는 먼저 승리를 만들어 놓은 이후에 전쟁을 치른다. 정확하게 판세를 분석하고 미리 내실을 다져 결정적 순간을 기다리는 승부의 세계를 간파한 것이다. 진정한 전쟁 리더는 적군을 죽이기 위해 감행하지 않고 승리를 확인하러 진군할 뿐이다. 분노의 전쟁은 안목의 전쟁보다 한참 아래다.

절차탁마(切磋啄磨)
좋은 옥은 자르고 썰고 쪼고 갈아서 만든다
시경 위풍편

고대 중국에서 옥의 가공기술은 네 단계를 거친다. 첫째 양질의 옥 원석을 구해 순수 옥만을 잘라낸다. 쓸모 있는 것과 버릴 것을 구분하는 것이다. 둘째 예술품으로서 원하는 모양대로 옥을 썰어낸다. 거칠지만 구체적 형색을 구비하는 단계이다. 셋째 망치와 정으로 옥을 쪼아대는 과정이다. 이때 불순물을 거르고 거친 부분을 매끄럽게 다듬는다. 넷째 마지막 완성을 향해 정교하게 갈고 닦는 과정이다. 좋은 작품은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지지 않는다. 빈틈없는 매뉴얼과 가공 절차에 의해 기본을 이루고 몸체를 구축한다.

그런 이후 예술적 기교와 세공에 의해 불후의 예술품으로 자리매김 된다. 동양의 리더십 교과서 <대학(大學)>에서는 선후를 파악하고 급한 것을 제대로 처리하는 지도자를 위대한 지도자로 정의 내린다. 모든 존재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다(物有本末). 어떤 일이든 처음과 시작이 있다(事有終始). 선후(先後)와 시종(始終)과 본말(本末)을 구분하는 과정이 바로 절차탁마다. 첫 단추를 잘 꿰고 순리대로 하나하나 밟아나가면 삶의 빛나는 옥을 얻을 수 있다는 명언이다.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窮則變 變則通 通則久)
궁하면 변하라,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 간다
주역 계사전

주역은 변화의 철학이다. 해결책 없는 궁지에 몰리는 상황이 오면 절망하기 쉽다. 이때 변화가 온다. 궁한 상태가 끝나고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할 즈음, 사람들은 용기 내어 답을 찾아본다. 즉 위기가 기회로 전환된다. 가고 오는 것이 원활해지면서 새 길이 열리는 단계가 통(通)의 단계다. 변하고 소통하면 오래 갈 수 있다. 물론 변화의 섭리를 잊고 안락에 길들여지는 순간 위기는 엄습한다.

주역에서 말하는 변화의 결정적 순간은 바로 곤궁함의 ‘궁(窮)’이다. 인간은 궁지에 몰렸을 때 사력을 다해 생존을 도모한다. 혁신과 혁명의 발상도 바로 춥고 배고프고 심신이 지쳤을 때 살아남기 위해 꿈꾸는 역발상이다. 어차피 위기는 온다. 중요한 것은 위기 탈출이요 위기 돌파다. 궁즉통의 정신이면 난세를 오히려 즐길 수 있다. 유(有)는 무(無)에서 유래한다. 유는 무로 돌아간다. 유장한 긍정의 힘으로 살아갈 필요가 있다.

교토삼굴(狡兎三窟)
꾀 많은 토끼는 위기 때 피할 수 있는 굴 세 개를 파둔다
사기 맹산군편

전국시대 제나라 정치가 맹상군은 식객 중에 풍환에게 일러 설 땅의 백성들에게 그동안 빌려준 돈의 이자를 받아오게 한다. 가난한 설 땅에 도착한 풍환은 맹상군에게 부채가 있는 사람들을 모두 불러 모은 뒤 그들 앞에서 차용증서를 불태운다. 곤궁한 백성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한다.

이 소식을 들은 맹상군은 풍환을 불러 화를 낸다. 1년 후 제나라 왕은 자신보다 인기가 높은 맹상군을 파면한다. 따르던 식객들 모두가 떠나도 풍환은 곁에 남았고 실각 소식을 들은 설 땅 백성들은 천리길을 달려와 맹상군을 위로하고 따른다. 풍환은 주군에게 고한다. “지혜 많은 토끼는 구멍을 세 개 뚫지요. 이제 경(卿)께서는 한 개의 굴을 뚫었을 뿐입니다. 경을 위해 나머지 두 개의 굴도 마저 뚫어 드리지요.” 그 후 풍환은 위나라 왕과 제나라 왕의 경쟁심을 유발시켜 맹상군을 제나라 재상으로 재등용되도록 도모한다. 풍환은 또 맹상군으로 하여금 설 땅에 제나라 왕의 선대 종묘를 세우게 한다. 제왕의 선대 종묘 영지를 다스리는 맹상군은 수십 년 간 무탈하게 재상으로 재임한다.

다가올 위험에 대비해 사전에 대책을 세우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의 차이는 평소에 굴을 뚫는 능력 차이다. 평온할 때는 누구도 굴의 중요성을 모른다. 굴은 위기 때 존재가치를 발휘한다. 길게 오래 사는 시대가 왔다. 제2의 능력발휘를 통한 인생 이모작, 튼튼한 건강, 경제적 자립, 사회적 봉사, 인간적 품위 유지. 이 모두는 미리 ‘굴’을 준비하는 사람에게만 다가온다. 준비 없이 맞이하는 노후는 무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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