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길의 편집력 시대 ⑫] 가난한 시 한 편, 세상 구원한다

이탈리아 최고의 예술영화 <일 포스티노> 포스터. 갓 잡아 올린 물고기 마냥 파닥거리는 은유를 익힌 마리오에게 세계는 다시 다가온다.

‘시와 공존하는 삶’…명화 ‘일 포스티노’에 담긴 은유의 미학

말이 비틀거리고 있다. 빛나는 한국말이 조롱·저주·비난을 펼치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 정치꾼들이 천박하게 구사하는 저질언어가 앞장서 한국어를 오염시키고 있다. 비아냥대는 꼼수는 그저 꼼수일 뿐이다. 자기성찰 하나 없이 남 탓, 체제 탓, 사회 탓만 하면서 경쟁 상대방을 넘어뜨려야 지고지순한 세상이 온다고 교언영색만 하니 말의 향기는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다. 품격 없는 말로 쌓은 바벨탑은 결국 무너지고 만다.

정치영역은 사회·경제·문화·교육·행정·외교 등 우리 사회 모든 분야가 최종적으로 융합하는 용광로다. 한국의 정치적 언어들은 어찌된 일인지 조화와 화합은 커녕, 갈기갈기 남 탓하기만 횡행한다. 정치해보겠다고 나선 이들의 미래 비전은 삭막하기 그지없다. 정치인들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언어적 감수성을 체득해야 한다. 정치 공간에서 활동하는 리더들은 말의 고결함과 언어의 위대함을 깨달아, 말만 부리는 실용성을 뛰어넘어 언어에 대한 경외감을 가져야 한다. 말이 휘청거릴 때 구원의 손길처럼 다가오는 이탈리아 영화 한편을 떠올린다.

언어가 메마른 가슴을 어떻게 적시는 지 보여주는 영화 <일 포스티노>(Il Postino, The Postman, 1994). 시골총각 마리오가 시인을 만나 운명적으로 삶이 변해가는 감동 스토리다. 남미 칠레의 위대한 국민시인 파블로 네루다(1904~1973). 저항시와 연애시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던 천재 시인 네루다가 우리 한국인들에게 가깝게 다가온 것은 바로 영화덕분.

정치적 탄압의 대상이 된 네루다가 1952년 이탈리아로 망명길에 오른다. 이탈리아 정부는 나폴리 근처의 작은 섬에 거처를 알선한다. 2년간 섬 마을에 머물면서 네루다는 마리오 루폴로라는 시골 청년과 깊은 우정을 나눈다. 시가 낳은 아름다운 인연이다.

30대 노총각 마리오는 가난한 어부 아버지를 모시고 살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인이 마을로 오자 전 세계 네루다의 문학 팬들이 편지를 보내온다. 마을 우체국장은 (산꼭대기 집에 거처를 마련한) 네루다 부부 우편물을 배달해주는 임시 직원을 모집하는데, 겨우 글만 읽을 줄 아는 마리오는 자전거가 있다며 지원하고 운 좋게 전속 배달부로 채용된다. 마리오는 마을 우체국과 시인의 집을 오가며 시인의 사는 모습을 물끄러미 살펴본다. 어느 날 더듬거리는 어눌한 목소리로 시인에게 고백한다.

시는 가난한 풍경, 넓고 높고 깊은 시야, 고즈넉한 시선을 담는다. 시가 다가오는 계절. 시가 태어나고 시가 자라고 시가 죽어가는 시간이다. 한 줄기의 시를 읊조리는 순간, 우리는 마리오가 되고 지중해 파란 파도가 된다.

“선생님, 어떻게 시인이 되셨나요. 저도 시인이 되고 싶어요. 시를 쓰면 여자들이 좋아하잖아요. 선생님, 은유(metaphor)란 무엇인가요.?”
순진 청년 마리오는 두 눈을 껌벅거리며 시의 문(門)을 두드린다. 네루다는 청년의 진실한 마음을 읽었는지 ‘은유’에 대해 설명해준다.
“마리오, 시란 은유야. 마음을 실어 다른 것에 비유해보는 거야. ‘하늘이 운다’면 이것이 무슨 말이지?”
“비가 온다는 말 아닌가요.”
“맞아, 바로 그게 은유야”
“선생님의 시 구절 중에서 ‘인간으로 살기도 힘들다’ 표현이 참으로 가슴에 다가와요. 그게 무슨 말이지요.?”
“난 내가 쓴 시 이외의 말로는 시를 설명하지 못하네. 시란 설명하면 진부해지지. 시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감정을 직접 경험해보는 것뿐이네. 해변을 따라 천천히 걸으면서 주위를 살펴보게. 그럼 은유를 알게 될 거야.”
그 날 이후, 마리오는 해변을 걷고 파도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자나 깨나 네루다의 시집을 손에 끼고 중얼거려 본다.
“어쩔 때 단어가 물결처럼 왔다 갔다 해요.”
“파도처럼 출렁거린다고? 그것이 바로 운율이라는 거야.”
“배가 단어들로 이리저리 튕겨지는 느낌입니다.”
“방금 자네가 한 말이 바로 은유야.”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 나는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누가 말을 해준 것도 아니고 책으로 읽은 것도 아닌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느 거리에선가 날 부르고 있었네
밤의 가지에서
느닷없이 타인들 틈에서
격렬한 불길 속에서
외로운 귀로에서
그 곳에서 얼굴 없이 사는 나를 건드렸네
파블로 네루다의 ‘시(詩)’ 중에서

네루다와 마리오의 詩창작 교실은 지중해 해변을 거닐면서 계속된다. 시의 뼈대는 은유. 눈에 보이는 것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중첩시킬 때 세계는 확장되고 의미는 증폭된다. 은유는 생생한 긴장감을 주고 지혜의 경계를 넓혀준다. 갓 잡아 올린 물고기 마냥 파닥거리는 은유를 익힌 마리오에게 세계는 다시 다가온다. 무미건조하고 쓸쓸했던 고향 섬도 아름다운 섬으로 재탄생되고 마을 처녀 베아트리체와의 첫사랑을 서툴게 읊는 시심은 부풀어만 간다. 칠레로 돌아간 네루다에게서 아무런 기별이 없어도 마리오의 믿음은 변치 않는다. 마리오는 네루다가 남기고간 짐을 부쳐주면서 그의 녹음기에 자신의 시심을 담는다. 섬마을 풍광의 소리를 담는 정경은 한편의 시처럼 아름답고 눈물겹다.

“선생님, 우리 섬의 아름다움을 이 테이프에 담아 보내드립니다. 그리고 부끄럽지만 제가 시를 한 편 지었습니다. 시 제목은 ‘파블로 네루다님에게 바치는 시’입니다.”

몇 년이 지났다. 네루다 부부가 선술집 문을 열고 들어선다. 네루다 부부와 나란히 포즈를 취한 마리오-베아트리체 결혼사진이 걸려있다. 홀에서 뛰노는 조그만 꼬마 아이를 향해 “파블리오”라고 부르는 베아트리체 목소리가 들린다. 베아트리체는 노시인에게 마리오의 기구한 죽음을 찬찬히 말해준다. 남편이 녹음한 테이프를 칠레로 보내지 않고 간직하던 베아트리체는 네루다에게 녹음테이프를 들려준다. 지중해 파도가 넘실거리는 해변을 걷는 네루다의 눈가에 눈물이 고인다.

시를 읽는 사람도 시인이다.
시를 가슴에다 가꾸는 사람도 시인이다.
시는 시인에게서 태어나 시심의 바다로 떠나간다.
시가 닿는 포구마다 시심이 피어난다.
시는 나눔이다.
시는 돈이 아니다.
시는 가난하다.
시는 가난한 풍경, 넓고 높고 깊은 시야,
고즈넉한 시선을 담는다.
시가 다가오는 계절.
시가 태어나고 시가 자라고 시가 죽어가는 시간이다.
한 줄기의 시를 읊조리는 순간, 우리는 마리오가 되고 지중해 파란 파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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