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산책] 에코휴머니스트 최재천의 ‘통찰’
‘자연 인간사회를 관통하는 최재천의 생각’
“나는 일찍이 생명을 글로 표현하고 싶었다. 어려서 나는 이 다음에 크면 시인이 될 줄 알았다.”
1970년대 말 유학을 준비하며 미국 대학에 보낸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의 자기소개서에 있는 말이다. 한국 사회에 통섭(consilence)이라는 화두를 던진 생물학자 최 교수가 <조선일보>에 연재한 ‘최재천의 자연과 문화’에 쓴 짧은 글들을 한데 모은 <통찰>(2012.10, 이음)은 ‘자연 인간사회를 관통하는 최재천의 생각’이란 부제를 달고 있다.
그는 “범인들도 폭넓은 독서, 깊은 사고, 오랜 연구, 활발한 토론 등을 통해 통찰력을 기를 수 있다. 나는 통찰력이란 스키너의 쥐와 쾰러의 침팬지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리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필자가 이 책에 ‘연필로 밑줄 그으며’ 읽은 대목들을 소개한다.
“생물 간의 관계는 크게 보아 네가지 형태가 있다. 경쟁, 공생, 포식, 기생이 그것이다. 경쟁은 기본적으로 관계하는 모두에게 해가 된다. 경쟁의 반대편에는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공생이 있다. 포식과 기생은 상대에게 해를 끼치며 자기만 이득을 취하는 일방적인 관계이다.”(15쪽, 인플루엔자)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동물의 무게를 다 합한다 해도, 식물의 무게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 발의 피’다. 지구는 단연 식물이 꽉 잡고 있는 행성이다.”(36쪽, 식물의 행성)
“최근 북유럽 바닷가에 사는 도요새들도 이혼한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스웨덴 동물행동학자들을 관찰에 따르면 전체 126쌍 중 28쌍(23%)이 갈라섰단다. 도요새의 경우에는 이혼사유가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이혼이 수컷들에게는 별다른 변화를 일으키지 않았지만, 재혼한 암컷들의 번식 성공률은 거의?두 배 가량 증가하더라는 것이다.”(75쪽, 새들도 이혼한다)
“오랑우탄은 풀피리를 만들어 위험신호를 보낸다. 태국의 사찰에서는 마카크원숭이들이 관광객의 머리카락을 낚아채 치실로 사용한다. 코끼리는 큰 나무나 돌로 전기 울타리를 무너뜨리기도 하고, 나뭇가지를 다듬어 파리채를 만들기도 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인간만이 사고할 줄 아는 동물이라고 생각했다. 천만의 말씀이다.”(86~87쪽,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
“서울동물원과 에버랜드동물원도 영장류 인지실험을 위한 시설을 갖추었다. 드디어 우리도 세계 영장류학계에 명함을 내밀 수 있게 되었다. 영장류 연구는 자칫하면 그들과 친해지는 데에도 몇 년씩 걸린다. 그래서인지 정부의 연구재단들은 이런 연구를 지원해주지 않는다. 우리 연구는 아무런 대가를 원하지 않는 어느 뜻있는 기업인의 도움으로 진행되고 있다.”(89쪽, 영장류학)
“나는 학창시절 쉬는 시간마다 선생님 흉내를 내던 달인 중 하나였다. 동물행동학자가 된 이후로는 종목을 동물소리로 바꿨다. 온갖 동물소리를 흉내 내서 조는 학생들을 깨우곤 했다. 아마 내가 가장 잘 내는 소리는 물개소리일 것이다.”(94쪽, 성대묘사)
“인간의 발은 26개의 뼈와 33개의 관절로 이루어져 있다.(중략) 인간의 발은 지난 400만년 동안 꾸준히 직립보행을 위한 적응과정을 거쳤다. 하지만 이 400만년의 진화과정을 한 순간의 무용지물로 만들 최대 실패작이 있다. 바로 신발이다. 길면 4만 년, 혹은 수천 년 전 불쌍한 발을 감쌀 목적으로 신기 시작한 신발이 오히려 발로 하여금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도록 옥죄고 있다.”(105~106쪽, 발)
“나는 <당신의 인생을 이모작하라>에서 우리 인생을 자식을 낳아 기르는 ‘번식기’와 자식을 길러낸 후의 삶인 ‘번식후기’로 구분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 일하는 세대와 일 안하는, 아니 일하고 싶은데 못하는, 세대로 나누는 구조로는 더 이상 세대가 유지될 수 없다.”(148쪽, 세대)
“내게는 죽기 전에 꼭 쓰고 죽겠다는 ‘생명’이라는 책이 있는데, 생물학 관점 뿐 아닌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물론 예술의 눈으로 바라본 생명의 모습을 그리려니 자연스레 두툼해질 것 같다.(중략) 나는 생명의 가장 보편적인 특성이 뜻밖에 죽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중략). 나는 이 글을 노무현 전 대통령이 홀연 자신의 생명끈을 놓아버렸을 때 썼다. 그의 육체는 사라지지만 그의 유전자는 남는다. 자손들의 몸을 통해 남는 유전자 뿐 아니라 그의 이상이 담긴 ‘노무현표’ 문화유전자(meme)도 세대를 거듭하며 퍼져갈 것이다.(151~152쪽,? 삶과 죽음)
“언젠가 소설가 은희경은 갓길로 운전하는 얌체를 응징하기 위해 함께 갓길로 들어가 그 차 앞을 가로막고 시속 5km의 속도로 운전한 적이 있단다. 불편은 참을 수 있어도 불공평은? 못 참는 법이다.”(157쪽, 불공평)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이 남북 간의 대화를 촉진했다는 공로는 진행하지만, 결과적으로 DMZ의 자연환경에는 독이 되고 말았다. DMZ는 이미 경의선과 동해선의 재개통으로 인해 바다가 단절된 고립 생태계가 되었다. 언젠가 통일이 되어 끊겼던 강원도와 경기도의 도로들이 모두 다시 이어지면 전 세계가 인정한 온대지역 최상의 자연보호구역인 DMZ는 결국 수많은 작은 생태계들로 토막나고 만다.(중략) DMZ를 통째로 보전하자는 계획이 꼭 남북정상회담의 어젠다가 되길되길 기대한다.”(203~204쪽, DMZ)
“1995년 어느 일간지에서 그 신문의 사진기자가 경기도 가평에서 찍은 ‘미확인 비행물체(UFO)’의 사진에 대해 나의 의견을 물어온 적이 있다. 나는 아직 확실한 과학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미확인 비행물체에 대해 뭐라 할 말이 없다고 대답했다. 이튿날 아침 신문에는 사진과 함께 고 조경철 박사님의 긴 설명이 실렸고 그 아래 한 줄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생물학자 최재천 교수, 전혀 관심없다’ 내가 외계생명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인 대답이 불가능해 말을 아낄 따름이다.”(235쪽, 외계 생명)
“함께 산행하다 곰에게 쫓기게 되자, 갑자기 신발 끈을 고쳐매는 어느 철학자에게 친구가 말한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곰보다 빨리 달릴 수는 없다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곰보다 더 빨리 달리려고 이러는 게 아닐세. 자네보다 빨리 달리기만 하면 되네.”(256쪽, 나가수와 진화)
“2AM 멤버의 조권은 무려 2567일의 최장기 연습생 생활을 이겨낸 성공신화의 주역이다.(중략). 소녀시대 멤버들과 함께 연습하다 카이스트에 진학한 과학영재 장하진의 경우는 예외가 아니라 아이돌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좋은 예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만나 식사를 한 두 아이돌 청년은 어느 누구 못지않게 반듯한 젊은이들이었다.”(266쪽, 조권 효과)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쇼는 ‘희망적인 거짓말은 엄청난 치료효과를 지니므로 그것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의사는 직업을 잘못 선택한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화가와 시인의 거짓말은 거짓말을 허락받았다’는 스코틀랜드 속담도 있다. 어쩌면 거짓말은 비상한 두뇌와 고도로 발달한 언어를 가진 인간의 전유물이자 특권일지도 모른다.”(275쪽, 거짓말)
“천수를 누리고 돌아가신 어느 어르신이 장기를 기증하시겠다고 하여 건강 검진을 하는데, 심장만큼은 20대 부럽지 않은 상태였다. 언뜻 보면 건강해 보이지만, 사실 그 분은 심장에 영양을 과다 소모한 것이다. 자연선택은 중용의 덕을 행한다.”(290쪽, 모델T와 중용)
“중학생 시절, 나는 남산 해방촌 골이 떠들썩한 구슬 재벌이었다. 당시엔 양철통에 설탕을 귀한 선물로 주고 받았는데, 양지바른 길목에서 구슬 따먹기로 모은 구슬이 그런 설탕통 몇 통을 채우고도 남았다.(중략) 나는 상대가 가진 마지막 구슬마저 몽땅 빼앗을 때까지 악착같이 공격했다. 물론 상대를 제압한 다음에는 구슬 몇 개를 쥐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야 그 친구가 또 다른 친구들과 경기를 벌여 재산을 축적한 후 나에게 다시 구슬을 헌납할 것을 알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나는 구슬을 버리고 책을 모으는 책벌이 되었다. 진정한 책벌은 책을 몇 권이나 가지고 있는지 자랑하지 않는다.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흐뭇해 할 뿐이다.”(297~298쪽, 책벌冊閥)
“자원전문가들을 앞으로 부족해질 자원으로 식량, 에너지, 물을 꼽는다. 공교롭게도 그 세 단어를 한데 엮으면 ‘거의 없다’는 뜻인 ‘few’가 된다.”(312쪽, 연해주 농장)
국립생태원 초대원장의 꿈
최재천 교수는 충남 서천에 세워진 국립생태원 초대원장에?취임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생태와 환경 그리고 개발의 아름다운 조화를 통한 21세기 고품격 대한민국이?그의 머리, 가슴 그리고 발품을 통해 구현되길 기대한다.
그는 늘 “알면 사랑한다”고 말한다. 필자는 지난 6월, 매거진N 창간호 칼럼을 청탁하며 그에게 “교수님을 ‘에코휴머니스트’라고 부르고 싶다”고 했다. 최 교수는 “과분하지만 고맙다”고 답했다. 생태인문주의자 최재천 교수의 <통찰>이 독자들에게 깊은 통찰력과 영감을 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