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석의 시선] 한글날 양화진에서 베델과 헐버트 선교사를 만나다

벽안의 선교사 두 분 덕에 우리는 이제 ‘코쟁이 처자’도 배우기를 열망하는 세계 최고의 글자로 신나는 삶을 영위하고 있다. 훈민정음 제정 578돌에 즈음에 생각해본 단상이다.(본문에서) 사진은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역

8일 오전 양화진엘 갔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곳엔 양대 종교의 성지인 양화진성지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한강에 면한 성지는 절두산 순교성지(국가 사적 제399호). 이곳에만 오면 왠지 숙연해지는 맘을 주체할 수 없다. 가톨릭이 주는 특유의 엄숙함, 게다가 이따금 마주치는 상대도 로만 칼라의 사제나 무채복색의 수녀가 대부분이니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들 수밖에.

이날 주 순례지는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이었다. 크기 4천 평(1만3천224㎡). 1890년 7월 28일 미국 장로교 파송 의료선교사로 활동하다 이질로 숨진 존 W 헤론의 가족이 매장지를 구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차, 이곳을 외국인 공동묘지로 불하해 줄 것을 조정에 요청했고, 우여곡절 끝에 허락받아 조성되었다. 이후 이곳은 한국을 사랑하고 이 땅에 묻히기 원하는 외국인 선교사와 그 가족의 안식처가 되었다.

이곳엔 총 417명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순례는 묘원 관리 주최이기도한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교회 주차장에서부터 시작한다. 이곳엔 고종 때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6‧25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위해 공헌한 벽안의 교육계, 종교계, 언론계 외국인 인사들이 묻혀 있다.

구한말 1900년 어간 연세대를 세운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한국명 원두우) 부부와 아들 호러스 호턴 언더우드(한국명 원한경) 부부, 배재학당을 세운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한국명 아편설라)와 그의 딸로 이화여전 초대교장을 지낸 앨리스 아펜젤러, 이화학당을 설립한 메리 스크랜턴 여사, 제중원과 기독교서회를 세운 존 W 헤론(한국명 혜론), 평양 선교의 개척자 윌리엄 홀(한국명 하락) 부부, 한국 최초의 맹인학교와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를 세운 로제타 홀(한국명 허을), 숭실대 설립자 윌리엄 M 베어드(한국명 배위량) 등.

그런가 하면 양기탁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영국 언론인 어니스트 베델(한국명 배설),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외교활동을 펼친 호머 베절릴 헐버트(한국명 흘법) 등의 묘가 있다. 묘원엔 특이한 묘소도 있다. 한 귀퉁이에 있는 어린이 묘소와 미군 묘소다. 대략 묘원 순례가 끝났다. 묘원을 떠나기 직전, B구역 한 사람의 묘지석 앞에 다시 머문다. 묘비석 앞에 거창하게 쓰인 문구.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그렇다. 아까 순례를 시작한 초기 묘원 구역에서 목도했던 바로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가 묻혀 있는 곳이다. 1863년 미국 동부 버몬트주 명문가 출신인 그는 1886년 미국 감리교회 파송 선교사이자 사학자, 7개 국어를 구사하는 언어학자, 최초의 서양식 학교인 육영공원 영어 교사, <독립신문> 발행 지원자, YMCA 초대회장이자, 한국어 연구와 보급에 앞장선 한글학자였다. 또 대한제국 말기 고종을 도와 국권수호를 적극 도왔고 무엇보다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한 독립운동가였다. 심지어 1907년 헤이그 밀사 파견을 돕고 스스로 특사로 현지에서 활동했다. 3.1운동 역시 적극 지지했다.

대한제국 시대 언론인으로 활동했던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과 더불어 헐버트이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인 1위로 꼽히는 건 당연지사. 1949년 정부 초청으로 광복절 기념식에 참가하고자 86세의 노구를 이끌고 내한하였으나 누적된 여독으로 인해 입국 7일 만인 8월 5일에 별세했다. “젊은 날 사랑했던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는 평소 고인의 유지에 따라 이 묘역에 안장됐다.

우리가 한글날에 즈음해 헐버트를 상기해야 하는 이유는 단 하나. 그의 한글 사랑,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한글을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게 한 주역이라는 점 때문이다. 그는 한글 사랑이 너무도 충만하여, 조선 상륙 3년 만인 1889년 최초의 순한글 교과서를 저술, 출간했는가 하면, 입국 당해 연도에 세계지리 교재인 <사민필지(士民必知)>와 <초학지지(初學地誌)>를 펴냈다. <사민필지>는 학생과 지식층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는데, 이 책에서 한글의 우수성을 극찬했기 때문.

특히 1892년 창간한 최초의 영문 월간 한국학 연구지 <한국휘보(The Korean Repository)>에서 세종대왕의 창의성과 애민정신을 소개하고, “한글은 대중언어의 매개체로서 영어보다 훨씬 우수하다”고 하는 등 한글의 우수성을 널리 알렸다. 1893년 선교사 자격으로 조선에 재입국한 그는 배재학당 교사로 일하며 국문연구소를 설립하고 한글 맞춤법을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띄어쓰기법과 가운뎃점 찍기를 도입했다. 나중에 한글학자가 된 제자 주시경의 도움을 받으면서. 주시경은 헐버트 선생과 한글 맞춤법 연구 등을 함께 진행하면서 띄어쓰기와 구두점 찍기외에 가로쓰기도 제안했다.

우리 국민은 이 벽안의 선교사에게 큰 신세를 졌다. 한글도 띄어 쓰지 않았다면 지금만큼 가독성이 높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컨대 어릴 적 장난으로 했던 말 중에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라든가 사춘기 때 ‘아기다리고기다리던데이트’, 또 ‘피자헛먹었다’ 등 썰렁개그는 띄어쓰기가 없었을 때 자연스레 나오는 혼돈이다. 우리나라 문맹률 1%라는 수치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다 이분 덕분이다.

또한 사람 빠지면 섭섭하다. 존 로스 선교사(1842~1915년). 이 분은 원래 중 선교사였다가 조선에 들어왔다 한글의 우수성을 보고 1877년 중국 선교지에서 저서 <조선어 첫걸음(Corean Primer)>이라는 한글 교재를 출판하면서 가로쓰기를 하게 됐고, 띄어쓰기도 함께 도입했다. 이 분의 시도는 헐버트보다 빨랐으나 대중에 보급되는 파급력으론 약했나보다.

벽안의 선교사 두 분 덕에 우리는 이제 ‘코쟁이 처자’도 배우기를 열망하는 세계 최고의 글자로 신나는 삶을 영위하고 있다. 훈민정음 제정 578돌에 즈음에 생각해본 단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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