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석의 新쾌도난마] 정보기관의 모토와 바이블

국정원 원훈석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 <국정원 홈페이지 캡처>

[아시아엔=윤재석 傳奇叟(이야기꾼), <국민일보> 논설위원 역임] 일전에 볼일이 있어 차를 갖고 서초구 양재동으로 향하다가 길을 잘못 들어 내곡동을 지나치게 됐다. 문득 3년 전 국가정보원의 원훈院訓과 원훈석院訓石을 놓고 한바탕 벌어졌던 소동이 떠올랐다.

2021년 문재인 정부 시절. 국정원은 창립 60주년을 맞아 원훈을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이라고 바꿨다. 원훈이 바뀌었으니 정문 들어서자마자 만나게 되는 원훈석 또한 교체해야 마땅(?). 문제는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의 원훈을 ‘어깨동무체’로 바위에 새겨 놓은 것이다.

원훈석이 교체되자 국정원 전직 직원 모임을 비롯해 일부 시민단체들이 강력하게 원훈석 교체를 요구했으나 관철되지 못하다 결국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2022년에 와서 문제의 원훈석을 들어내고 사반세기 동안 국정원 뒤뜰 한켠에 처박혀 있던 최초의 원훈석,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를 꺼내 설치했다.

소동의 원인은 소주 ‘처음처럼’의 로고로 대중에게 익숙한 ‘어깨동무체’의 주인인 우이牛耳 신영복申榮福 때문이다. 1941년 경남 밀양 출생인 그는, 서울대 상대(현재는 인문사회대) 경제학과 출신 엘리트로 육군사관학교 교관 시절이던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받고 대전·전주 교도소에서 20년간 복역하다 1988년 8·15 특별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그는 이후,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쳤으며, 1996년 사면 후 대학 강의(성공회대 석좌교수)로 지식을 전파하다가 2016년 별세한 대한민국 대표 지식인이다.

개인적으로 <더불어 숲>,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청구회 추억> 등 그의 저술 몇 권을 읽고 나름 감동을 느낀 적도 있다. 지금도 내 서가엔 그중 몇 권이 꽂혀 있다.
그의 글은 잔잔하다. 특별히 이념적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사상적으로 우리 국가 정체성과 대척점에 있던 그의 서체를, 비록 잠시라 하더라도 다른 곳도 아닌 정보기관의 원훈석에 새긴 것에 대해서는 당시 정권의 저의底意와 사상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국정원 원훈석은 그 조직의 내막을 모르는 일반인들에겐 상징성 그 자체다. 따라서 1961년 김종필이 중앙정보부(국정원 전신)를 창설했을 당시 제정한 부훈部訓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1997년까지 37년 동안 한 자리를 지키면서 백성들의 뇌리에 강력하게 각인돼 있었다. 3‧4‧5공화국, YS 정부 등 무려 4개 정권에 걸친 장구한 세월 동안이었다.

그러다 DJ 정부가 출범 직전인 1998년 1월 “정보는 국력이다”로 바뀌더니, MB 정부 시절인 2008년 10월엔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으로 교체됐다가,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6년 6월 “소리 없는 헌신, 오직 대한민국 수호와 영광을 위하여”로 다시 바뀐다.

그러니 문재인 정부가 원훈을 또 바꾼 것에 대해 뭐라 하기 어렵지만 앞서 얘기했듯 전향 고백을 하지 않은 사상범 출신의 서체를 사용한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다시 한 번 복기復碁하고픈 의문점. 도대체 문재인 전 대통령은, 또 그 정권의 국정원 수장(필자의 대학 단과대 후배임)은 왜, 무엇 때문에 원훈석 서체를 ‘신영복체’로 했을까. 법에 따라 징치懲治할 사안은 아니라 해도 지금껏 찜찜한 기분이 든다.

그러고 보니 한 정보기관의 모토에 눈길이 간다. 바로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모토다. 공식 모토는 ‘We are the Nation’s first line of defense(우리는 국가 방어의 최선선이다)’다. 뭐 별로 특기할만한 점은 없다. 그런데 진짜 관심을 끄는 것은 이른바 비공식 모토 ‘And ye shall know the truth and the truth shall make you free’다.

근데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구절 아닌가! 그렇다. 바로 신약성서 요한복음 8장 32절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 구절이다(영문 구절은 킹제임스흠정역)

CIA가 어떤 존재인가? 연방수사국(FBI)과 쌍두마차로, 세계경찰을 자임하는 미국의 정보와 수사를 국외와 국내로 양분해 담당하면서 특히 세계를 상대로 천인공노할 만행도 서슴없이 저지르는 사악함의 결정판인 존재가 바로 CIA다. CIA의 수다한 만행 중 대표적인 거 딱 하나만 예로 들자!

할리우드 B급 배우 출신인 로널드 레이건 집권 시절이던 1986년 폭로된 이른바 이란-콘트라 사건(Iran–Contra affair)의 경우, CIA가 적성국이었던 이란에게 무기를 몰래 수출한 대금으로 중미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좌익정권을 무너트리기 위해 우익 성향의 반군 콘트라를 지원하는 동시에 그들로부터 마약을 사들인 후 자국에 팔다가 발각되어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일단 CIA 공작으로 이란에 무기를 대략 정가의 3배 정도 되는 비싼 가격에 팔아먹은 거야 적성국 바가지 씌우기였으니 그렇다 치자. 문제는 차액을 CIA가 독식해 비자금을 조성하고, 그 돈을 콘트라 반군에 지원하고 그 대가로 콘트라 반군이 현지 코카인 재배 농가들로부터 현물세로 거둔 코카인의 처분까지 위탁 받아 미국으로 밀반입했다. CIA가 본연의 정보 수집 업무는 내팽개치고 ‘악덕무기 밀매상’에 ‘마약 중간 공급책’ 역할로까지 캐릭터를 변신한 것이다.

그런 CIA가 저작권료도 내지 않고 성서 구절을 훔쳐 1947년 창설 당시부터 지금까지 근 80년을 줄기차게 써오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CIA의 진면모를 모르듯, 창립 멤버들이 왜 하필 요한복음 구절을 도적질했을까 하는데 대해서는 불가사의지만, 그것이 혹 스스로의 사악함을 위장하기 위한 속보이는 술수는 아니었을까? 30여 성상星霜의 기자로서의 직장 생활 내내 업무상 미국을 들여다봤고, 근무로 또 학업으로 수년간 그곳에 살았던 입장에서 해본 추측일 뿐이다.

사악하기로 CIA 뺨치는 이스라엘 첩보기관 모사드(Mosad)의 모토 역시 성경구절이다. ‘너는 전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지략의 많음에 있느니라(Surely you need guidance to wage war, and victory is won through many advisers)’(NIV버전 구약 성서 잠언 24장 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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