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석의 新쾌도난마] 日새 총리 개신교도 이시바, 야스쿠니 참배 할까?
일본 자민당 간사장을 지낸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67)가 1일 제102대 총리에 취임했다. 그는 지난달 27일 사실상의 차기 총리를 뽑는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제28대 총재에 선출됨으로써 이날 열린 임시국회에서 신임 총리로 인준 받고 임기를 시작했다.
이시바는 여러 면에서 관심을 끄는 인물이다. 우선 방위상을 지낸 군사 전문가로 자민당 내 안보통으로 불리며 일본의 군사력 강화와 안보체제 구축에 큰 역할을 해왔다. 또 ‘헌법에 자위대 명문화’, ‘집단적 자위권 행사’ 등을 줄기차게 주장, 보수 정치인으로서의 확고한 색채를 보여 왔다.
그와 반대로 경제 정책과 한일관계엔 비교적 온건하고 유연한 스탠스를 보여와 ‘비둘기파’로 평가받는 가운데, 당내 보수 강경파(사실상 극우파)들로부터는 강력한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는 철저한 비주류였다. 따라서 대중적 지지도가 높아 매번 차기 총리 후보 1순위에 랭크되었지만, 막상 강경파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는 국회의 총재 선거에선 계속 패배하였다.
그럼에도 그가 무려 5수 끝에 총리에 선출된 것은 변화와 개혁에 대한 국회 전반의 분위기가 반영된 결과로 해석되고 있다. 그의 집권은 향후 자민당의 정책 방향, 특히 안보와 경제 분야에서의 변화 가능성을 시사한다. 아울러 당내 통합과 외부로부터의 신뢰 회복이라는 난제를 해결해야 할 책무도 안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관심을 끄는 것은 그가 보여줄 최고지도자로서의 행보다. 자민당 총재 피선 직후 그는 그의 종교 때문에 세인들로부터 초미의 관심을 받았다. 그가 4대째 개신교를 신봉해오고 있는 독실한 크리스천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개신교인은 전체 인구의 0.4%에 불과하다. 더욱이 일본 최고위 정치인인 그로서는 그야말로 천연기념물인 셈이다. 제52~54대를 지낸 민주당 소속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郞) 이후 두 번째 개신교 총리다.
이시바는 소싯적 교회 부속 유치원을 다녔으며, 18세에 일본 내 최대 교단인 일본기독교단에 속한 돗토리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후 지금껏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기독실업인회(CBMC)가 주최하고 있는 국가조찬기도회 단골 참석자이기도하다.
그의 신앙은 외가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외조부 가나모리 츠린(金森通倫)은 시인 윤동주(尹東柱)가 수학한 도시샤대(同志社大)를 세운 니지마 조(新島襄)의 제자로, 일본 교회 초기 지도자로 활동하며 오카야마(岡山)와 돗토리(鳥取) 지역에서 열성적으로 복음을 전했고 교회 개척에도 깊이 관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에 더해 외조모의 신앙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본인 역시 “평생 기독 신앙을 갖고 있다”고 고백할 정도로 독실한 신앙을 견지해오고 있다.
그에게 더욱 기대가 집중되는 이유는, 이같은 신앙의 바탕 위에 일본 제국주의의 그릇된 역사에 대해 반성한다는 뜻을 여러 차례 내비친 바 있다는 데 있다. 실제로 그는 일제가 저지른 대동아전쟁, 태평양전쟁을 침략전쟁으로 규정했으며, “한국을 비롯한 피해국이 납득할 때까지 사과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같은 그의 발언은 일본 주류사회의 대세와 달리 과거사를 지속적으로 반성하고 사과해온 일본 기독교계의 기조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 또한 당내 강경파의 좋은 공격거리가 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무엇보다 전범들이 합사되어 있는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를 참배해온 자민당의 역대 총재들과 다른 행보를 보일 수 있으리라는 예측이 벌써부터 나오면서 당의 분위기를 냉각시키고 있다.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는 패전 40주년이었던 1985년 8월 15일 당시 총리였던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曽根康弘)의 공식 참배로 테이프를 끊은 뒤,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가 1992년 11월 일본 유족회의 눈을 피해 도둑 참배하는가 하면, 1996년 7월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郎)가 사촌이 합사되었다는 핑계로 사적으로 참배하는 등 공식, 비공식 꼼수 참배가 이어졌다.
이 문제로 우리에게 최대 공분을 선사했던 이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다. 그는 한국과 중국의 완강한 반대에도 아랑곳없이 취임 직후인 2001년 8월 13일 야스쿠니를 참배했다. 그나마 패전 60주년인 2005년 8월 15일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한 ‘고이즈미 담화’를 발표하면서 잠시 숨을 고르는가 싶더니 퇴임을 앞둔 2006년 8월 15일엔 기어이 야스쿠니를 참배하면서 주변국의 항의에 대해 “어쩌라고, 이 반대세력아!”이라는 표현까지 쓰며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일본 정계 전반에서 “교양 있고 합리적이다”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이시바의 등장을 과연 한일관계 개선을 긍정하는 신호탄으로 볼 수 있을까? 일각에서는 그가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으로 식민 지배에 대해 공식 사죄한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이후 한일관계 개선에 가장 적극적일 거라는 관측마저 나오고 있다.
하지만 낙관은 아직 이르다.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 독도 영유권 등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의 기존 입장과 궤를 같이하고 있는 터라 당장에 획기적 변화를 기대하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비등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자위대 명문화 외에, ‘아시아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추진 등 우리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을 내세우는 점 역시 향후 한일 갈등의 불씨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전반적인 성향을 고려할 때 한일관계가 적어도 뒷걸음질 치진 않을 것이라는 낙관론은 지배적인 상황이다.
1885년 초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로부터 시작된 일본 역대 내각총리대신 중 또 하나의 개신교인 하토야마 이치로도 재미있는 인물이다. 1945년 패전 직후 발 빠르게 보수 우익 정당인 자유당을 창당, 몸집을 키우다가 연합군 최고사령부에게 찍혀 이듬해 공직 추방령과 금고형을 선고받은 그는, 평소 서로 좋아 죽고 못 살던 절친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에게 당을 맡기고 일단 야인으로 돌아갔다. 5년 후 당으로 복귀했으나 요시다가 배신을 때리고 총리직을 내어주지 않자 1953년 탈당해 분당파 자유당(分党派自由党)을 결성, 도전에 나섰으나 정권 탈환에 실패한다. 결국 고개 떨구고 다시 친정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요시다 내각의 잇단 뻘짓으로 인기가 추락하자 이듬해 재탈당해 일본민주당을 창당하고, 그해 말 보따리를 싼 요시다의 뒤를 이어 여소야대의 취약한 상태에서 총리직을 거머쥐었다. 그러다 분열을 거듭하던 사회당 좌우파가 1955년 들어 똘똘 뭉쳐 하토야마를 위협하자 그해 11월 결국 친정과 합당, 통합 보수우익의 자유민주당을 창당한다. 이는 1993년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가 7개 정당 연립의 비자민당 출신 제79대 총리로 등장하기까지 무려 38년 자민당 장기집권의 시작점인 이른바 ‘55년 체제’의 태동이었다. 그의 파란만장한 정치역정을 볼 때, 이 또한 그가 개신교인으로서 전투보다는 융화를, 대치보다는 화합을 추구하는 성정을 지녔기 때문 아닌가 추정하게 된다.
55년 체제를 박살낸 호소카와 역시 흥미로운 인물이다. 그는 집권 후 “한국인이 창씨개명과 위안부, 강제 징용 등의 여러 형태로 괴로움과 슬픔을 당한 것에 대해 가해자 입장에서 마음으로 반성하고 사죄한다”고 밝혀 일제 강점을 사과한 최초의 일본 총리가 됐다.
여기서 빠지면 아쉬울 인물이 또 하나 있으니 바로 제93대 총리를 지낸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다. 광복 70주년을 사흘 앞둔 2015년 8월 12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 한 초로의 신사가 방문했다. 그는 이날 낮 이곳을 찾아 방명록을 작성하고, 여옥사(女獄舍)를 찾아 유관순 열사가 투옥됐던 8호 감방에 헌화했다. 이어 다른 옥사와 사형장 등을 둘러본 후 순국선열 추모비에 헌화한 뒤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은 채 묵념한 후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해 진심으로 죄송하다”라고 사죄했다. 이 영상은 지금도 온라인상에서 짤로 엄청 돌아다닐 정도다.
그날 그의 사죄 모습은 마치 1970년 신동방정책의 일환으로 동유럽 폴란드를 방문한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독일이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했던 옛 유대인 게토(ghetto)의 전몰자 묘역에서 무릎 꿇고 용서를 비는 모습과 닮아 있다. 그만큼 진정성이 짙게 묻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누구인가? 바로 하토야마 이치로의 장손이다. 현대 일본 정치 역사상 자민당 독주에 제동을 걸면서 2009년 9월 최초의 정권 교체를 이룩한 인물이기도 하다. 비록 9개월의 짧은 집권 후 야인으로 돌아갔지만, 퇴임 후에도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의 저급한 역사 인식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면서 과거사에 대해 사죄하지 않는 정권을 거듭 질타해 왔다.
하토야마는 ‘우애’를 각별히 강조해 왔다. 그것은 프랑스 국기가 상징하는 ‘자유(청색)’, ‘평등(흰색)’, ‘우애(홍색)’의 바로 그 우애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하토야마는 비록 기독교인은 아니더라도 그의 조부 DNA를 쏙 빼닮은 것 아니냐는 관측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그가 역대 일본 총리 중 대한민국 국민이 가장 호감을 가지는 게 어느 면 당연한 일이다.
부디,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일본 신임 총리 이시바의 선한 심성이 대한(對韓) 정책에서도 따사롭게 꽃 피워 양국 사이에 훈풍으로 승화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