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석의 시선]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507회 종교개혁 기념일에 부쳐
종교개혁하면 우리는 흔히 마르틴 루터(1483~1536년)를 떠올린다. 당연하다. 그는 당시 교회의 관습이었던 면벌부免罰符 판매에 대한 비판으로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성 교회 정문에 이른바 ‘95개조 논제’를 붙인다. 이 파문이 마침내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그는 교황으로부터 파문칙령破門勅令을 받았지만 불태워 버렸다. 극한 대치 속에 루터는 1521년 신성로마제국 의회에 환문還門되어 그의 주장을 철회할 것을 강요당한다. 그가 이마저 거부하자, 제국으로부터 추방처분을 받는다.
그로부터 9개월 작센 선제후選帝侯의 비호 아래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은거, 신약성서의 독일어 번역을 완성했다. 그것이 독일어로 된 첫 성서이자 독일어 통일 및 표준화에 크게 공헌하는 단초가 된다. 그리고 비텐베르크로 다시 돌아와 이른바 ‘멸시’의 뜻으로 불리던 호칭, 즉 루터라는 이름의 개신교회를 창설하니 그것이 오늘 ‘루터교회(Lutheran Church)’다.
이처럼 루터는 종교개혁파와 개신교 창시자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루터에 앞서 서방교회 교황 지지자들과 지도자들의 부패를 비판하다가 1411년 대립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파문당한 또 한 사람의 루터를 만나야 한다.
바로 얀 후스(1372~1415년). 체코의 신학자이자 종교개혁가인 그는, 1415년 5월 4일 발표된 콘스탄츠 공의회 결정에 따라 7월 6일 화형에 처해진다. 하지만 그가 화형당한 후 그의 사상을 이어받은 이들이 보헤미안 공동체를 만들고, 그의 주장은 루터 등 알프스 이북의 종교개혁가들에게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18세기 이후 설립된 모라비아 교회, 혹은 체코 개신교로 현재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런 후스에게 강력한 영향을 준 신학자가 있으니 바로 영국의 신학자 존 위클리프(1320?~1384년)다. 그는 ‘성서를 믿음의 유일한 권위’로 강조하는 복음주의적 성향을 처음 제창한 이로, 후스와 루터가 결국 그의 신앙 성향을 이어받게 된다. 후스가 위클리프의 아들, 루터가 손자인 셈이다. 위클리프는 타계 2년 전인 1382년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기 시작한다. 주위의 극심한 반대와 생명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번역을 마친 그는 후기에 다음과 같이 적는다.
“성경이 번역되었다. 그리고 이제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통치가 가능하게 될 것이다.”
인류 사회를 향한 ‘성경대헌장’이었다. 이 헌장은 1863년 미국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 게티스버그 연설을 함으로써 세상에 널리 퍼진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이제 민주주의 헌장의 핵심이다.
글자가 없는 종족에게 글자를 만들어주고 성경을 번역해주는 위클리프 선교단체의 이름이 왜 ‘위클리프’일까? 오는 10월 31일은 507번째 종교개혁 기념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