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석의 新쾌도난마] 40년 부부의 지하철 경로석을 둘러싼 논쟁

내가 일반석 착석을 선호하는 이유는 내년으로 전망되는 초고령사회(super-aged society) 진입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가능하면 일반석을 점유함으로써 교통약자석에 불편한 누군가가 한 명쯤 더 앉게 하기 위해 부린 나름의 작전이다. 근데 집사람의 논지는 “당신이 교통약자석을 이탈해 일반석으로 가는 건 피곤에 지친 학생이나 회사원, 각종 자영업이나 소상공업에 종사하는 분들의 소중한 자리를 빼앗는 거”라고 들이댄다.(본문 가운데)

일흔두 번째 생일이었던 개천절 집사람과 함께 강원도 철원 일원을 둘러봤다. 근 40년 만의 철원행이었다. 오전 10시쯤 조선 중기 임꺽정林巨正이 의적을 참칭하고 은거, 또는 신출귀몰했다는 철원 최고 명소 고석정孤石亭엘 갔더니 마침 ‘2024 철원 고석정 꽃밭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몇 개의 주차장은 이미 꽉 차 있었고, 24만㎡(축구장 34개 크기)의 꽃밭은 온갖 기화요초琪花瑤草와 사람들 물결로 부산했다. 각종 향내가 공중을 휘저으면서 코를 자극했고 연인, 친구, 엄마‧아빠 따라 나온 꼬맹이들의 재잘거림과 자지러진 웃음소리가 심금을 정화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드는 애잔한 생각, 축 늘어진 어깨와 활처럼 굽은 등, 한 걸음 옮길 때마다 가쁜 숨을 몰아쉬어야 하는, 때로 휠체어에 의지해 가족 도움으로 겨우 움직이는 수다한 노년들을 보면서 울컥하는 느낌이 들었다. 젊은이들이 보면, 우리 부부도 그렇게 보일 거라는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옷깃을 가다듬고 어깨를 쫙 편 뒤 활기찬 행보로 현장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문제는 집사람. 최근 무릎 통증으로 힘들어하고 있던 터. 하지만 이 여자 역시 짐짓 안간힘을 쓰는 듯, 둘이는 보무도 당당히 아주 씩씩하게 꽃밭 물결을 따라 걸었고, 한두 바퀴 돌고 돌아 먹거리 장터에서 이것저것 주전부리로 점심을 때웠다.

그러다 최근 지하철을 타고 동반 모임에 가면서 둘 사이에 벌어진 해프닝이 떠올랐다. 상황은 이러했다. 지하철 탑승을 하게 되면 나는 당연히 일반석 빈자리를 먼저 찾는다. 순전히 내 맘대로의 측정이지만, 건강상 그리 허약한 편은 아니다. 실제로 6개월마다 보건소로부터 출두 명령을 받아 이것저것 체크해 보면, 신체나이가 실제나이보다 몇 년 정도 젊게 나온다. 또 2년마다 정기건강검진을 받아보면, 약간의 고지혈증 말고는 이렇다 할 질병 예후가 없다. 그러고 보면 나의 엉터리 진단키트도 그리 엉망은 아닌 듯싶다. 그러니 굳이 몇 좌석 안 되는 저쪽을 기웃거릴 필요가 없다. 그러는 사이 집사람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교통약자석 쪽으로 성큼 걸어간다.

짧은 순간 둘 사이에 이처럼 팽팽한 긴장이 도는 건 지하철 좌석에 대한 뚜렷한 입장 차이 때문이다. 내가 일반석 착석을 선호하는 이유는 내년으로 전망되는 초고령사회(super-aged society) 진입을 눈앞에 두고, 가능하면 일반석을 점유함으로써 교통약자석에 불편한 누군가가 한 명쯤 더 앉게 하기 위해 부린 나름의 작전이다. 근데 집사람의 논지는 “당신이 교통약자석을 이탈해 일반석으로 가는 건 피곤에 지친 학생이나 회사원, 각종 자영업이나 소상공업에 종사하는 분들의 소중한 자리를 빼앗는 거”라고 들이댄다.

일견 맞는 얘기다. 하지만 나는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는다. 40여 년 부부의 연을 맺어오면서 우리는 다양한 주제를 놓고 부단하게 티격태격하면서 살아와 서로를 익히 알고 있기에 빈틈을 보일 경우, 그대로 KO패하는 걸 감수해야 한다. 따라서 일체의 양보는 금물이다. 임전무퇴에 배수진. 집에 와서도 쟁론은 계속된다. 물론 집사람의 주장에 대해 속으로는 어느 정도 동의한다. 개중엔 취업준비생도 있을 테고, 아깝게 떨어진 대학에 재도전하기 위해 절차탁마 열공에 여념이 없는 학생도 있을 것이고, 위로부터 눌리고 아래로부터 치어 명퇴를 심각히 고민하는 만년 차장 샐러리맨도 있을 터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이른바 개발연대 주역으로 일컬어지는 ‘58년 개띠’(올해로 66세)가 본격적인 은퇴를 시작한 2020년, 그동안 각계 각처에서 지칠 줄 모르고 활약했던 이들의 흠뻑 젖은 열정은 수명을 다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들의 활약상은 이젠 경로당이나 노인정의 심부름꾼 막내의 모습으로나 이따금 목격될 뿐 이렇다 할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는다.

아직 관절이 튼튼해 불수도북(불암산→수락산→도봉산→북한산)을 완주한 후 숨은벽 능선을 타고 내려와 구기동 어간에서 막걸리로 하산주를 들이키는 노익장도 없진 않지만, ‘삼식이’ 소리를 들으며 마누라 구박에 눈칫밥을 먹는 이가 대부분일 터다.

통계청이 2일 발표한 ‘고령자 통계’를 보면, 65세 이상 고령인구 비중이 향후 계속 증가하며 드디어 내년에 전체인구의 20%를 돌파, 초고령사회에 진입하게 되고 이후 △2036년 30% △2050년 40%에 달하고, 2072년에는 50%대로 예상돼, 바야흐로 ‘틀딱의 전성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면 뭐하나? 어차피 화려한 대한민국의 오늘에서 볼 때 틀딱은 사실상 용도폐기돼 화장실에 버려진 구겨진 휴지 같은 존재인 걸.

젊은 시절, 산업 현장의 최전선에서, 열사의 사막 한복판에서, 피 터지는 무역전장의 한복판에서, 조금 더 올라가선 이역만리 서독의 탄광 갱도에서, 뮌헨의 병원 영안실에서 본국 부모님의 생계와 형제, 자매, 오빠, 누이의 학비를 벌기 위해 궂은 일도 마다 않고 뼈 빠지도록 일해 온 틀딱들.

그들은 과연 퇴물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무대 뒤로 사라져야 하는가? 언제부턴가 아파트 같은 라인에 사는 한 노인에게 눈길이 가곤 했다. 현역에서 은퇴한 분은 맞는 것 같은데 주로 자전거를 타고 오가거나 자전거를 수리하는 모습을 목도하기도 했다. 과묵하고 무뚝뚝해 다가가기 쉽지 않았지만, ‘누가 이기나 보자’ 하는 심사로 볼 때마다 목례하고 안부를 물었다. 어느 밤 늦은 저녁 아파트 바로 옆 근린공원에서 각종 운동기구로 ‘공짜 피트니스’를 하고 있던 차, 그가 나타났다.

운동이라야 뭐, 윗몸 일으키기, 삼두 운동 등 설치된 기구로 하는 약식. 자연히 운동하면서 이 얘기, 저 얘기를 하게 됐다. 사립여고 상업 교사로 봉직하다 퇴임했고, 요즘은 시각장애자 트레킹 인솔 등 갖가지 봉사활동을 하는데, 그리 기분이 상쾌할 수 없다고 한다. 그 외에도 시립노인복지관에서 노인들에게 컴퓨터 사용법 강좌(1급 자격증 소지), 10월에 열리는 선사문화축제 등 각종 행사의 질서유지반 책임자 등으로 현역 때보다 더 바쁘게 산다며 내게도 참여를 권유했다.

‘틀딱’이 해야 할 일을 찾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 있겠느냐고 했더니 복지관에 ‘글쓰기 강좌’ 같은 걸 개설해 달라고 요청할 테니 강사로 와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 일단 한번 복지관의 강의 프로그램을 지켜본 후에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여운을 뒀지만, 배운 도둑질을 써먹을 수 있는 봉사가 가능하다면 그것도 나름 보람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 요청이 오면 수락하고 바로 뛰어들 판이다.

한편으로 아침녘이나 오후 등하교 시간에 학교 인근 건널목에서 깃발 수신호로 교통 지도를 펴고 있는 노년들을 바라볼 때도 괜히 정감을 느끼게 된다. 자기 손주도 아닐 텐데 저리도 열심히 아이들의 등하교를 돕는 것을 보면 덩달아 으쓱해진다. 게으른 늙은이의 은근슬쩍 숟가락 얹기?

하지만 뭐 어쩌랴! 비록 돈 되는 일은 아니지만, 시사 온라인 포털과 개신교 성향의 온라인 포털 및 레거시 미디어(legacy media)에 글줄깨나 올리고 있으니 이것 또한 무지렁이 틀딱의 허송세월은 아닐 터. 아무튼 9988234를 끈질기게 외치던 소강小崗 민관식閔寬植처럼은 못 살지라도, 아파트 이웃을 보며 운신 가능할 때까지는 닥치는 대로 섬기는 일에 종사하기로 다짐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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