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 칼럼] “진실은 중간적일 수 없다…나는 어떤 불이익에도 진실 편에 설 것”
인간의 역사는 항상 거짓과 진실이 서로 다투는 형국일지도 모른다. 저마다의 잣대에 따라서 나는 ‘진실’이고, 너는 ‘거짓’이라고 규정지으면서 다툼이 시작되고, 급기야는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으로 비화되기도 한다. 그 진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판독조차 할 수 없는 ‘진실게임’이 되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아니야, 진실이란 살아있는 것이기 때문에 단순히 어떤 것 사이의 중간적인 것일 수 없어. 그것은 양쪽 영역을 계속 탐색함으로써만 발견할 수 있는 거야. 그리고 그 둘을 적당한 비례로 조화시키는 것이 최후의 비결이기는 하지만,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미미하고 불모한 인생을 미리 마련하는 것과 같네.” 월리엄 포스터의 <하위즈 엔드>에 실린 글이다.
작은 것은 작고, 큰 것은 큰 것처럼, 진실은 하나밖에 없는데, 온갖 것들이 다 나와서 나만 ‘진실’하다고 한다. 그 알 수 없는 진실과 거짓의 간극間隙을 헤집고, 누군가는 승자가 되고 누군가는 패자가 된다.
승자와 패자를 도스토예프스키는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영웅이 되거나 진흙덩어리가 되거나 둘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다. 중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내가 애통하게 생각하는 점이다. 진흙 속에서 내가 영웅이 되었을 경우를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영웅은 진흙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 극도의 숭고함은 방탕한 중에, 내가 방탕의 한가운데 빠져 있을 때 찾아온다…..그렇다고 해서 그 숭고함의 출현으로 방탕이 제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숭고함은 대조되어 더욱 빛나고, 소스에 자극적인 맛을 주어야 하는 것처럼 방탕 속으로 엄습한다.“
사실, 한 세상 살아가면서 고통 속에 행복을, 행복 속에 고통을 느끼는 것이 다반사다. 그런데, 져서는 안 되는 싸움이라는 생각에 빠져 전체를 걸고 싸울 때가 있다. 그런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시절에도 품위를 잃지 않고 산다는 것이 어렵긴 어려운 모양이다. 그래서 그것이 가끔씩 슬프다.
자! 주사위는 던져졌다. 진실과 거짓 어느 편에 설 것인가?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느 편도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내게 어떤 불이익이 닥칠지라도 진실의 편에 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