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의 이·아·세] 대마도…”멀고도 가까운 나라 일본에서도 가장 먼 섬”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대마도 문제를 이렇게 매듭짓는다. “임진년에는 아무 이유도 없이 모두 철수해 갔다. 그렇기 때문에 두 나라가 전쟁하는 기간에는 털끝 만한 힘도 빌리지 못했고 오히려 해로움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습을 시행해 온 지가 오래되었으니 갑자기 중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먼저 군사를 통해 위엄을 보인 다음에 다시 약속을 정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대마도는 우리 민족에게 어떤 곳인가? 몇 년 전 오랜만에 찾은 대마도는 예전보다 더 쇠퇴한 듯 어딜 가도 사람들은 잘 보이지 않고, 울창한 나무숲이 더 울울창창했다. 대마도는 과연 우리 민족에게 어떤 곳인가?

대마도는 본래 신라에 속한 땅이었으나 점차 일본인들이 거주하게 되면서 왜구의 땅으로 변하게 되었다. 대마도는 인구가 적고 농토가 척박하여 농사에 적합하지 않아 기근을 면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더구나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는 일본 국내의 내란으로 정상적인 교역을 통한 식량 구입이 어려운 상태였으므로 몰락한 무사와 농민 등 빈민이 증가하여 중국과 한반도에서 약탈을 감행하였다.

이처럼 중국 연안에서 활동한 일본인 해적 집단을 왜구라 하였는데, 고려 말 조선 초기에 왜구를 근절하기 위해 그들이 주 활동 영역으로 삼고 있던 대마도를 세 차례에 걸쳐 정벌하였다.

첫 번째 대마도 정벌은 1389년에 있었다. 우왕이 재위하던 14년 동안 378회나 침입한 왜구의 소굴이 대마도라고 생각한 조정에서는 박위에게 전함 1백여 척과 1만여 명의 군사를 주어 대마도를 정벌하게 하였다. 그는 왜선 3백여 척을 불태우고 붙잡혀 있던 고려인 1백여 명을 찾아 돌아왔다. 그럼에도 왜구의 침입은 여전하였다.

두 번째는 1396년 8월 9일 동래, 기장, 동평성을 함락한 왜구가 병선 16척을 탈취하고 수군 만호를 살해하는 등 날이 갈수록 잔악해지자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단호히 조치했다. 즉 1396년 12월 3일 우정승 김사형을 보내 대마도 정벌에 나서게 하였고, 그가 귀환할 때 친히 흥인문 밖까지 나가 노고를 치하했다고 한다.

세 번째 정벌은 세종 1년인 1419년에 있었다. 이종무를 3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로 임명하여 정벌에 나섰다. 병선 227척과 1만 7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대마도에 도착하여 왜구 114명을 참수하고 2천여 채의 가옥을 불태웠으며, 선박 129척을 노획하거나 불태웠다. 세 차례에 걸친 대마도 정벌 이후 왜구들은 대마도를 비롯한 서부 일본 각지에서 약탈보다는 평화적 임무를 갖고 왕래하기 시작하였다.

이중환이 지은 <택리지> 기록을 보자.
“그 이전에 장헌대왕이 장수를 보내어 대마도를 토벌하였지만, 관원을 두어서 지키지 않고 다시 도주에게 되돌려주었다. 당시에는 우리나라에서 왜인을 관에 머물게 하지 않았을 것인데 이런 일이 어느 때 시작되었는지 알 수가 없고 아무 의미 없는 일이기도 하다. 대마도는 본래 왜 나라에 딸린 것이 아니라 두 나라 사이에 위치해서 왜국을 빙자하여 우리에게 요긴한 체하고, 우리를 빙자하면서 또 왜국에게 요긴하게 보이는 박쥐처럼 행세하여 스스로 이로움을 취하고 있으니, 토벌하여 우리에게 복종하게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도주를 해마다 한번씩 우리 조정에 조회(朝會)하도록 하여 순종하면 신하에게 상을 주는 예로서 전일에 주던 액수와 같이 후하게 주고 관을 지어 주어 머물게 하고, 세조를 주는 것은 마치 공(貢)을 바치는 것과 같아 명분이 정당하지 못하니 바삐 폐지하는 것이 옳다. 대마도는 대부분의 땅이 매우 메마른데 인구는 많아서 고려 말기에 해적들은 모두 이 섬사람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달래어 도둑질하지 않게 하려고 하나, 이는 모두 임시방편일 뿐이고 구차한 노릇이다. 또 예전에도 이와 같은 예가 없었다. 하물며 그들은 이미 우리 경내에 있고 또 우리나라 복색으로 변장하고 말까지 배워서 나랏일을 염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택리지>의 이와 같은 기록처럼 대마도는 항상 조선에 불편한 대상이었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대마도 문제를 이렇게 매듭짓는다.
“임진년에는 아무 이유도 없이 모두 철수해 갔다. 그렇기 때문에 두 나라가 전쟁하는 기간에는 털끝 만한 힘도 빌리지 못했고 오히려 해로움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습을 시행해 온 지가 오래되었으니 갑자기 중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먼저 군사를 통해 위엄을 보인 다음에 다시 약속을 정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대마도(쓰시마)

대마도는 한국 남단과 일본 열도 사이의 대한해협 중간에 위치해 있다. 고려 말부터 한국에 조공을 하는 관계였으나 왜구가 득세하여 세종 때 정벌한 바 있다. 대마도는 멀고도 가까운 나라 일본에서도 가장 먼 섬인 셈이다. 대마도는 멀고도 가까운 나라 일본에서도 가장 먼 섬인 셈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대마도는 면암 최익현이나 조선통신사를 공부하는 사람들, 그리고 부산에서 배를 타고 건너가 일본을 답사하려는 사람들이 즐겨찾는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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