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의 시선] “살아온 만큼의 얼굴을 지닌다…프랑스 작가 보규에의 도스예프스키 평가처럼”

살다 보면 어느 사이에 나를 두고 평한 사람들의 말을 들을 때가 있다. 나를 좋게 평했든 나쁘게 평했든 내 마음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하지만 가끔은 그들의 말에 상처 받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도 있지‘ 하고서 금세 잊고자 한다. 어떻게 내가 ’하나의 우주‘인 다른 사람의 마음 속을 알 수 있을 것인가?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그가 살아온 삶과, 그의 사상을 제대로 아는 것이 순서인데, 풍문에 떠도는 이야기를 가지고 한 사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나 지금이나 사람의 모습을 보고 그를 평한다.

도스예프스키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 자신의 모습에 그가 살아온 삶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전제하에서, 프랑스 작가로 <러시아의 소설>이란 작품을 펴낸 보규에가 러시아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를 만나고 쓴 글을 보자.

“그의 모습은 그의 소설의 주요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그를 한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두 번 다시 잊을 수가 없다. 그의 모습은 얼마나 그의 작품을 표현하고 있었던 것일까. 왜소하고 여위고, 극도로 신경질적이고, 60년에 걸친 처참한 생애에 지치고 억압되어, 늙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색이 바랬다고 하는 편이 옳으리라. 수염은 길고 머리 빛은 바래서,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불구不具의 노인과 같은 풍채를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그 자신이 언젠가 말한 적이 있는 고양이와 같은 생명력生命力을 충만시키고 있었다. 그의 용모는 러시아의 농민, 모스크바 지방의 토박이 농부의 얼굴이었고, 생기 있는 표정을 가지고 있지만 때로는 우울해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온화해 보이기도 했다. 넓은 이마에는 여러 개의 주름살이 박히고, 이마 자체는 위로 치솟아 있었다. 그의 관자놀이는 망치로 두드려 넣은 듯이 우묵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화려한 섬광閃光을 지닌 특징은 모두 멜랑콜릭한 입가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나는 쌓이고 쌓인 고뇌가 인간의 얼굴 표정 위에 그토록 표현되고 있는 것을 아직껏 본적이 없다. 정신과 육체의 위기가 속속들이 거기에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우리는 그의 용모 속에서, 그의 작품에서보다 더 선명히 <죽음의 집>의 기억이며, 공포와 의혹과 수난에 넘친 기나긴 시기를 읽어볼 수 있었다. 그의 눈꺼풀, 입술, 얼굴의 하나하나 근육은 신경성의 경련으로 바르르 떨렸다. 그가 이상理想을 토로하면서 생기 있는 표정을 하거나, 혹은 화를 내거나 하면, 사람들은 예전에 어디선가 이 얼굴을 본적이 있다고 단언할 수 있었으리라.

비록 그것이 배심재판소陪審裁判所의 피고석에서 본 것이건, 아니면 감옥으로 통하는 길을 걷는 부랑자浮浪者들 사이에서 본 것이건 간에, 그러나 평상시의 그의 얼굴은 언제나 성화聖畵에 그려진 옛날 성인聖人들의 특징인 저 슬픔어린 신비스러움을 띠고 있었다.

그가 구비하고 있는 것은 모두 민중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러시아 농민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무례함, 교활, 친절성이 말로는 형용하기 힘든 이상한 혼합을 보이고 있었다. 거기에는 뭐라고 정의 내릴 수 없는 불안不安한 것이 있어서, 그것은 아마도 집중적인 두뇌노동이 빈민貧民과 같은 이 얼굴에 아로 새긴 것이리라. 우선 처음에 곧잘 반발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그 후에야 비로소 그 특유의 개인적인 매력이 작동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

프랑스의 작가 보규에가 평가한, 도스토예프스키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펴낸 뒤 생애의 마지막 2~3년간 모습이다. 가장 정확하게 도스토예프스키의 모습을 평가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살다가 나이가 들면 자기가 살아온 만큼의 얼굴을 지니게 되는 것이 인간이다. 나는 모르는 나의 얼굴을 남들은 이렇게 저렇게 말할 수 있는데, 당신의 지금 얼굴을 다른 사람들은 어떤 형태로 기억하고 있으면서 당신에 대해 뭐라고 말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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