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의 이·아·세] 자연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가을 들녘이 아름다움을 넘어 처연하다. 노랗게 익어가는 벼 이삭 너머 포플러나무 몇 그루가 마치 고흐의 그림 속 풍경 같다. 이문세의 노랫말처럼, ’이렇게도 아름다운 세상‘에서 인간사는 어떤가?
흑黑과 백白, 검은 것은 검은 것이고, 흰 것은 흰 것이다. 그 분명한 사실이 이 세상에서는 서로 어긋나고 어긋나서 이쪽과 저쪽으로 나뉘고, 그래서 인간 세상은 항상 시끄럽다. 여기도, 저기도, 다 화합하지 못하고 불편한 관계, 그게 인간사라고 여기며 살기엔 이 세상에서의 삶이 그리 긴 것이 아니라서 가끔씩 가슴이 아플 때가 있다.
그러나 조금만 더 넓게 생각해보면 인간사 별것 없고, 넓은 의미에서는 잠시 살다가 가는 인생이다. 자연自然 속에서 자연의 일부분으로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갈 뿐인데, 왜 그렇게 서로 다른 듯 살고 있는가?
“모든 사물은 ‘그’라고 부르지 못할 것이 없고, 또 ‘이것’ 이라고 부르지 못할 것이 없다. 자기를 떠나서 ‘그’의 처지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도 환히 이해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라는 개념은 ‘이것’이 있기에 생겼고, ‘이것’이라는 개념은 ‘그’라는 것이 있어서 생겼다고 말할 수 있다. 즉 ‘그’와 ‘이것’은 상대적 개념이다.
그러나 상대적인 것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생生에 대해 사死가 있고, 사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생이 있다. 가可에 대립하여 불가不可가 있고, 불가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가가 있다. 시是에 기인하여 비非가 있고, 비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시가 있다.
그러므로 성인은 이런 상대적 입장에 있지 않고 인위를 초월한 자연의 입장, 즉 하늘(天)의 입장에서 사물을 보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시비의 상대성을 초월한 진정한 시의 입장이다. 이런 절대적인 입장에서 보면 ‘이것’도 바로 ‘그’요. ‘그’도 ‘이것’과 같은 것이 된다. ‘그’에게는 ‘그’를 근거로 한 시비의 판단이 있으며, ‘이것’에는 ‘이것’에는 ‘이것’을 근거로 한 판단이 있다.
이와 같이 ‘그’와 ‘이것’이라는 개념이 입장만 바꾸어서 볼 때 바로 역전하는 성질의 것이라면, 과연 ‘그’와 ‘이것’이라는 개념이 처음부터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없다고 해야 할 것인가. 이같이 ‘그’니, ‘이것’이니 하는 대립이 해소된 경지, 이를 도추道樞라고 한다.
문짝의 추樞(지도리)는 고리 속에 끼워짐으로 하여 비로소 무한한 방향으로 작용을 발휘하게 된다. 이 절대적 입장에서면 시라는 개념도 무궁한 변화중의 하나요. 비라는 판단도 무궁한 변화중의 하나가 되어, 그 자체로서의 존재 이유를 상실하고 만다. 앞에서 명을 가지고 그 입장에서 비추어 보아야 한다고 한 것은 이를 가리키는 것이다.“ <장자>에 나오는 말이다. 장자의 말을 빌려서 모든 대립이 해소된 경지, 도추道樞가 필요한데, 그것이 쉬운 것 같지만 쉽지가 않다.
바둑의 하수가 고수들이 바둑을 두는 것을 뒷전에서 보면 고수보다 더 잘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 원리이므로 하수下手가 나은가, 고수高手가 나은가가 불분명한 상태가 오늘날의 세상 풍경이다.
“말하지 마라. 아무 말도 하지 마라. 이 나무도 생각이 있어 여기 이렇게 자라고 있을 것이다.“ <장자>가 ‘인간세편’에서 이렇게 나직하게 속삭이는 것과 같이 세상은 저마다의 자유로 그 자유로움을 위해 살고 있는데, 사람들은 왜 그렇게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려고 애를 쓰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