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의 시선] 대마도에서 의병장 ‘임병찬’과 동학지도자 ‘김개남’을 추억하다.
추석 직후 대마도를 오가며 의병장 임병찬과 동학의 지도자 김개남을 다시 추억했다. 대마도의 최익현이 순절한 비가 서 있는 곳 수선사에서 전북 시인협회 회원들에게 갑오년 동학의 지도자 김개남과 그를 고발한 의병장 임병찬과 최익현에 대한 얘기를 풀어놓았다.
조선도 아니고 이국 땅 대마도까지 유배를 갔던 조선의 고집스런 유학자 최익현과 그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던 임병찬, 그리고 남조선을 열어젖히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겠다던 김개남, 그들은 어떤 관계로 맺어진 사람들인가? 그 당시의 상황을 나는 1995년 펴낸 <동학의 산 그 산들을 가다>에 다음과 같이 실었다.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에서 산내로 가는 섬진강의 지류는 더없이 아름답다. 이제 물이 오르기 시작하는 버들강아지가 섬진강 맑은 물에 제 그림자를 드리우고, 겨울을 보내느라 앙상하게 줄기만 남은 갈대들은 바람에 서걱거렸다. 그날 전봉준이 피노리에서 잡히지 않았다면 이 길을 걸어 산내로 갔을 것이다. 흰 눈이라도 내렸다면 그는 외로운 발자국 남기며 이 길을 터덜터덜 걸어갔을 것이다. 가슴은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지만 아직은 포기할 수 없는 정녕 그럴 수 없는 믿음 다지며 걸어갔을 것이다. 잡히지 않았다면 종성리에서 김개남을 만나 재기의 칼날을 갈았을 것이다. 다시는 실패하지 않을 계책을 몇 날 며칠이라도 몇 달이라도 세웠으련만, 그것은 이미 흘러 가버린 강물에 다름 아니었을 것이다.
그때도 저렇게 저 강물은 도란도란 흘러 갔을까? 남원, 곡성, 구례 지나 남해로 흘러가면서 갑오년 그해 겨울 “아무개 아무개가 내가 지나는 그 강변 마을에서 붙잡혀 갔고 그 근방 마을 사람들이 닭똥같이 굵은 눈물 흘리며 그들의 가는 길을 전송했었다”고 들려 주기나 했을까. 김개남은 회문산 아래 산내면 종성리 매부집으로 몸을 숨겼다. 그 마을에 옛친구 임병찬이 있었다. 그는 아전 출신이었고 그 근방의 부호였다. 임병찬이 아랫마을에 있는 김개남에게 자기가 있는 마을로 올라 오라고 한 뒤 전주 감영에 신고했다. 전라감사 이도재는 강화 수비병의 종군이었던 황헌주와 포교들을 보냈다. 김개남이 숨어 있던 집을 포위한 관군이 “어서 나와 포승줄을 받으라”라고 말하자 김개남은 측간에서 변을 보고 있다가 “올 줄 알았다. 똥이나 누고 나가겠다” 하고 껄껄 웃었다고 한다.
김개남을 잡아 갈 적에 그가 혹시 도술을 부릴지 모른다고, 열 손가락 열 발가락 손끝 발끝에 대꼬장이를 박았다고 하며, 그의 부하들에 의해 탈취될 것을 염려해서 짚둥아리로 묶어서 데려갔다고 한다. 그때 그 광경을 지켜본 농민들이 불렀던 참요가 있다.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 수천군사 어디다 두고 짚둥아리가 웬 말이냐.“
김개남은 전주로 끌려가 전라관찰사 이도재의 즉결심판으로 전주 서교장에서 효수당하여 고난에 찬 생애를 마감했다. 그 처형 상황을 한말의 유학자인 매천 황현은 이렇게 적어 놓았다.
적 김개남이 형벌에 복종하여 죽음을 받았다. 심영(沁營)의 중군 황헌주(黃憲周)가 개남을 포박하여 전주에 도착하자 감사 이도재가 개남을 신문하였다. 개남은 큰소리로 “우리들이 한 일은 모두 대원군의 은밀한 지시에 의한 것이다. 지금 일이 실패한 것은 또한 하늘의 뜻일 뿐인데 어찌 국문한다고 야단이냐”고 하였다. 도재는 마침내 난을 불러오게 될까 두려워 감히 묶어서 서울로 보내지 못하고 즉시 목을 베어 죽이고 배를 갈라 내장을 끄집어 냈는데 큰 동이에 가득하여 보통 사람보다 훨씬 크고 많았다. 그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다투어 내장을 씹었고, 그의 고기를 나누어 제사를 지냈으며 그의 머리는 상자에 넣어서 대궐로 보냈다.
김개남을 밀고한 임병찬은 훗날 면암 최익현과 더불어 의병활동을 시작하였고 대마도까지 동행한다. 면암 최익현의 순절 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그후 다시 체포되었고, 1916년 5월 유배지 거제도에서 단식사하고 만다. 나라를 위한 마음은 똑 같았지만 나라를 위한 방법은 그렇게 달랐다.
지난해 4월 우리들은 김개남이 죽은 지 100년이 넘어서야 그가 살았던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 마을에 ‘김개남 장군이 살았던 옛터’라는 유허비를 세웠고 덕진공원에 신영복 선생의 글씨로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라는 추모비를 세웠으며, 1995년 4월 9일에 그가 살았던 마을 입구에 그의 무덤을 만들고 묘비를 세웠다.
아직 포장이 끝나지 않은 비포장도로에 내 마음은 덩달아 흔들렸다. 나는 김개남이 잡힌 산내면 종성리 돌아 전주로 갈 것이다. 아이들은 피곤이 깊지 않은지 떠들썩하다. 나는 아이들에게 조용히 해라, 말하지 않았다. 지금은 나 혼자만 침묵할 뿐이다.
내 마음 속에 하나씩 둘씩 살아나는 그리운 이름들 있다. 내 가슴 속에 울컥 되살아나는 그리운 얼굴들이 있다. 지금은 잊었다고 고개 흔들어도 그날의 그 역사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두손 들고 거부해도 내 마음 속에 시퍼렇게 살아 달려오는 아름다운 이름, 아름다운 얼굴들이 있다.
형체도 없이 분해되고 해체되어 사라져갔던 그들이 갑오년의 그 역사가 다시금 이 땅에 저렇게 선명하게 되살아오는 그것들은 무엇인가. 곧 이어 이 땅에 봄이 오고 내가 가는 이 길 모퉁이마다 연분홍의 진달래 꽃이 피어나고 저 섬진강변 구석진 곳 어디에서고 버들강아지는 피어나리라.
그러나, 아직도 이 땅은 두 동강이로 갈라진 땅이고, 사람과 사람들이 사람이 만든 이념으로 쓰잘 데 없는 욕심으로 만나고 합하지 못하는 땅이다. 나는 물었다. 사람이 한울인 나라 미륵의 나라 그리운 나라여! 당신은 어디쯤에 있고 우리는 어디쯤 가고 있는가?
의문 속에 도착한 종성리에서 나는 여기가 원래의 종성이냐고 물었고 사람들은 누구를 찾아 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봉두난발의 조선 사내 김개남이 이곳에 왔었느냐고, 그리고 어디로 갔느냐고 묻지 못하고 원종성이 정말로 맞느냐고만 다시 물었다. 목이 메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나서야 동학농민혁명이 국가 기념일로 지정되었으니, 역사는 느리게 느리게 진전하는 것이 맞다는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