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석의 新쾌도난마] “너나 잘 하세요~”
상황1 최근 도심 통과 지하철 안
어느 역에 열차가 멈춰섰을 때 일단의 승객들이 우르르 밀려들어왔다. 빈자리라야 고작 두서너 석. 자리를 차지하려는 신입 승객들의 치열한 좌석 쟁탈전이 벌어져 객차 안은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했다.
그 중엔 5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아낙들도 있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이 잽싸게 한 자리를 차지하면서 다른 이가 앉으려는 옆 공간을 핸드백으로 점유한 다음 외쳤다. “권사님! 여기요, 여기.”
도저히 그 아낙 무리와 같은 객차에 있고 싶지 않아 옆 칸으로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 그러자 어디선가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어떻더냐?”
상황2 2024년 9월 절친 대학동창들과의 회식 자리
술이 몇 순배 돌아가자 한 친구가 하는 말.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지 종교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사실 이 말을 들은 좌중 모두가 잠시 뭔가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왜? 그는 집안 대대로 시제時祭만 1년에 열다섯 번 모신다는 ○○○씨, ○○○파 몇 대손 장손 아닌가!
그러더니 말을 잇는다. “얘기 나온 김에 한 마디만 더 하자. 죽마고우 재석이가 은근슬쩍 교회 나가기를 원하는 눈친 걸 잘 알지만,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거야. 왜냐구? 내가 예수쟁이들한테 사기를 한두 번 당했어야지, 원.”
독실한 힌두교도인 모한다스 까람찬드 간디가 기독교에 대한 무한한 존경과 경외의 염(念)을 표하게 되어, 한 때 개종까지 심각하게 고려했으나 기독교인들이 보이는 이중적 태도로 인해 개종을 포기했다는 일화가 그 저녁 내내 떠돌았다.
기독교인을 참칭僭稱하는 나는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정말 나는 지하철 속 중년부인들보다 더 공의롭게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과연 객차를 옮길 만큼 그들의 이기심을 질타할 자격이 있는가. 기독교를 믿지 않겠다고 단호히 말하던 50년 절친을 분노케 한 교인이 혹 나는 아니었을까.
유대인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의 참된 신앙 기초에 입각하여 살아가지 않는 이유로 “예수 믿는 것을 무슨 하나의 편리한 도구쯤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예수님이 나 대신 고난당하고, 나 대신 남 사랑 다 하고, 나 대신 십자가 형벌 다 받았으니 나는 대충 놀고먹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생각, 그래서 그저 “예수님의 공로”, “예수님의 은혜”, “믿습니다”만 연발하면 능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래 전 읽었던 레프 톨스토이의 <참회록>을 다시 꺼내 본다.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장자크 루소의 참회록과 함께 세계 3대 참회록으로 불리는 톨스토이의 참회록에서 새삼 발견한 것은, 그가 50세쯤 되었을 때 자살을 생각했었다는 사실이다.
결혼을 하고 문학가로 입신양명해 유럽 고급 사교계에서 물적, 지적 사치를 한껏 즐기던 그가 지천명知天命에 자살을 하려 했던 연유는 무엇이었을까. 러시아정교의 정통 신앙 속에서 자라온 그는 18세가 되던 해, 신앙을 버리고 가장 세속적이고 합리적인(?) 삶을 살아가기 시작해 20대 중반에 이르러 이단의 교주가 되려는 야심까지 가질 정도로 오만해진다.
생애의 절정기 내내 끊임없이 신의 무능함과 침묵을 비난하면서 절망의 늪을 헤매던 그는 깊은 참회를 통해 호두껍질보다 단단한 아집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면서 마음의 평화를 얻고 거듭난다.
어디 톨스토이뿐이겠는가. 스스로 “하나님을 믿는다” 칭하면서 기실 자신만을 굳게 믿는 ‘용감한 신앙’을 견지하고 있는 교인들이 세상엔 얼마나 즐비한가. 오죽하면 여호와가 성경(구약 이사야서 29장 13절)을 통해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고 탄식했을까.
아니 그건 ‘바로 지금 이 순간의 나’를 가리키는 가장 적절한 표현이기도 하다. 여호와의 탄식은 나로 하여금 회개(repentance)와 참회(penitence)를 명령하는 동시에 다음과 같은 준엄한 경고로 이어진다.
신약성경 야고보서는 2장 14절과 17절에서 각각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흔히 기독교를 이신득의以信得義의 종교라 말하곤 한다. 맞다. 그렇다고 일단 믿어 ‘떼어 놓은 당상’처럼 구원을 얻었으니, 맘 놓고 그른 언행을 해도 된다는 뜻일까. 그렇다면 야고보서가 구구절절 강조하는 이행득의以行得義는 뭐란 말인가?
갑자기 감독 박찬욱의 복수 시리즈 중 하나인 영화 <친절한 금자씨>가 떠오른다. 교도소 문을 나온 금자(이영애 분)의 출소 환영 행사를 나온 전도사(김병옥 분)가 두부를 주며 “깨끗하게 살라는 뜻으로 가지고 왔어요”하자 무표정한 얼굴로 두부를 떨어뜨리며 하는 말, “너나 잘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