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손익분기점, 선악분기점
욥기 24장
욥에게는 자기 인생이 망가져버린 것 같은 고통 외에 또 다른 고통이 있었습니다. 망가져가는 세상을 사는 고통입니다. 망해야 할 사람들이 망하지 않고 형통해야 할 사람들이 망해가는 현실이 납득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욥기 24장에는 그런 욥의 심경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땅의 경계표를 옮기며 양 떼를 빼앗아 기르며 고아의 나귀를 몰아 가며 과부의 소를 볼모 잡으며 가난한 자를 길에서 몰아내나니 세상에서 학대 받는 자가 다 스스로 숨는구나“(욥 24:2-4)
욥이 이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는 이유는 이 문제가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욥처럼 정직하고 온전하게 살아온 사람도 없습니다. 인과응보나 권선징악같은 프레임에 비추어 봤을 때, 욥이 당하고 있는 고난은 해석이 안되는 것입니다.
친구들이 내놓은 해석이라곤 ‘분명히 뭔가 잘못한 게 있으니까 이런 벌을 받는 것이 아니냐? 잘 생각봐라’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좋은 사람에게도 나쁜 일은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그가 좋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욥기의 출발이 그랬습니다. 사탄이 보여준 언행을 볼 때, 선을 가만히 두고 보지 못하는 것이 악의 속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악은 선을 악용합니다. 악해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선은 늘 악용당합니다. 선해서 그렇습니다. 악해서 그렇고, 선해서 그럴 수밖에 없는 선과 악의 속성입니다.
왜 성경은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계속 선을 도모하라고 했을까요?(롬 12:17) 아무리 선한 동기라도 악을 갚으려다 보면 선이 악해지기 때문입니다. 악용당하더라도 선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선으로 악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악하게 살아서 망하면 악하게 살 사람 있을까요? 망하지 않고 성공하니까 악하게 삽니다. 그러나 선하게 살아서 망한다 해도 선하게 살 사람은 있습니다. 악하게 살아서 성공한다 해도 악하게 살지 않을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악이 득세하는 것에 분노하고 악인의 형통함에 고뇌하며 때로는 그것을 부러워하면서도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기로 마음을 먹는 것이 복입니다(시 1:1).
선악보다 손익이 더 중요해지는 시대입니다. 이득이 되면 악이라도 허용이 되곤 합니다. 그러나 선은 이익이라서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옳기 때문에 따르는 것입니다.
신앙은 손익분기점보다 선악분기점에 더 예민해지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