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하나님의 공의’는 어디에?
욥기 8장…처벌과 보상의 질서에 용서와 은혜라는 질서가 교차하는 지점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욥 8:3-4)
빌닷의 발언입니다. 빌닷에 의하면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란 인과응보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벌을 받고, 좋은 일을 많이 하면 복을 받는다는 것이 빌닷이 말하는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억울하다고 말하는 욥의 이야기가 빌닷에게는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왜곡하는 것으로 들린 것입니다.
인과법칙은 세상이 돌아가는 기초적인 질서입니다. 인과법칙이 무너지면 세상은 존속이 어렵습니다. 불을 땠는데도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고 가을 볕이 쬐이는데도 곡식이 익지 않으면 어딘가 이상이 생긴 것입니다. 사람을 죽였는데도 벌이 없고, 사람을 살렸는데도 칭찬이나 상이 없는 세상은 어떨까요?
인과응보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율법을 잘 지키면 복을 받고, 율법을 어기면 벌을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것도 그들이 지은 죄에 대한 응당한 벌이었습니다. 이것이 정의이고 공의이긴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게 다가 아니라고 끊임 없이 말씀합니다. 인생에 발생한 문제에 특별한 이유가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욥기 1장은 인간이 생각하는 인과법칙이 생각처럼 매끄럽게 작동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입니다. 욥의 고통은 욥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좋은 사람에게도 나쁜 일은 일어나고, 나쁜 사람에게도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원인과 결과가 깔끔하게 연결되지 않는 일이 세상에는 의외로 많습니다. 결과가 원인에 뒤따르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결과가 앞서고 원인이 뒤따르는 것을 경험할 때도 있습니다. 과거 아픔의 까닭을 시간이 한참 흐른 미래에서 발견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제자들은 선천적 시각장애의 원인을 과거에서 찾으려 했지만 예수님은 인과법칙을 넘어서는 대답을 들려주십니다.
사실 우리가 늘 하나님께 던지는 질문이 그렇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우리는 항상 인과론적 설명을 하나님께 요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은 원인에 대한 친절한 설명이 아닐 때가 더 많습니다.
대신에 다른 질서를 하나 더 소개해 주십니다. 마치 평면도를 가지고 건물의 실제 생김새를 파악해보려는 사람에게 홀로그램을 보여주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질서 속에는 죄를 지은 사람이 죗값을 치르는 차원의 x축도 있지만, 죄가 없는 사람이 죗값을 대신 치러주는 y축도 있습니다. 그 x축과 y축이 교차(cross)하는 지점이 십자가입니다.
처벌과 보상의 질서에 용서와 은혜라는 질서가 교차하는 지점에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