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하나님을 섬긴다는 착각
욥기 32장
“그는 욥의 세 친구에게도 솟아오르는 의분을 참을 수 없었다. 그에게 답변다운 답변을 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잘못이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되어버렸으므로 못마땅하였던 것이다.”(욥 32:3, 공동번역)
욥과 세 친구들의 열띤 논쟁을 지켜보던 엘리후가 참다 못해 입을 엽니다. 엘리후는 화가 났습니다. 친구 세명이 욥 하나를 설득하지 못하는 국면이 답답했고 하나님의 정의에 오류가 있는 것처럼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친구들이 그토록 열을 올렸던 이유가 드러났습니다. 그들이 논쟁한 이유는 하나님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안간힘을 다해 하나님을 방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변호사가 되어 몸부림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변호를 받아야 하는 하나님이 하나님일까요? 인간의 보호가 필요한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닐지 모릅니다. 욥이 친구들의 말에 논리적으로 설득이 되면 하나님이 옳고, 욥이 설득이 안되면 하나님이 틀린 것일까요?
자신이 믿는 진리를 옹호하려는 마음은 십분 이해가 가지만 자신들이 펼치는 논리적 치밀함을 하나님의 진리와 동일시 하는 것은 굉장한 교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보호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하나님을 공격해도 이 관계는 변하지 않습니다.
엘리후는 욥 때문에 하나님의 존귀함에 흠이 생긴 것 처럼 말하는데, 오히려 진리의 가치를 자신의 논리 아래 두려고 하는 엘리후의 태도가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꼴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아이를 사랑하는 것과 아이를 향한 모성애적 행위에 도취되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을 향한 종교적 열심에 도취되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이 둘이 굉장히 비슷해 보이기에 우리는 쉽게 속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자신들만큼 하나님을 위하고 섬기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예수님의 발을 씻으면 씻었지 어떻게 예수님이 내 발을 씻길 수 있냐고 발을 뺏지만, 예수님은 당신께서 발을 씻어주시지 않으면 너와 내가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섬김이 필요한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의 섬김을 받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시면서 섬기셨습니다. 그 섬김을 그저 받아들이는 것보다 더 크게 주님을 섬기는 길은 없습니다.
세 친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위하고자 했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욥을 위하시는지를 먼저 헤아렸어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