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다 잘 될거야’ 덕담이 축복 대신 저주일 수 있습니다”
창세기 49장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창 49:28)
야곱은 임종 직전에 열 두 아들들을 한 자리에 다 불러놓고 한명 한명 축복합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축복하는 자리였지만 어떻게 보면 이 자리에서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사람은 아버지 야곱입니다.
임종 직전에 아들 모두와 인사를 나누고 생을 마감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게다가 그 자리에는 요셉이 있었습니다.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아들이 자신의 임종을 지켜주고 있는데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야곱은 아들 한명 한명의 이름을 불러가며 그들을 축복합니다. 그런데 축복의 내용이 어딘가 이상합니다. ‘이게 무슨 축복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축복이라고 하면 최대한 좋게 좋게 말해주는 게 일반적인데 야곱은 아들들 듣기 좋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야곱은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합니다.
진정한 축복이란 무엇일까요? 상대의 넓이와 깊이, 그릇의 분량을 잘 아는 사람이 해주는 말이 축복입니다. 종종 나를 잘 아는 어른의 뼈때리는 한 마디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말은 듣기 좋은 립서비스 백 마디 천 마디보다 더 유익합니다.
우리는 상대를 잘 모르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듣기에 좋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상대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니까 누가 들어도 기분 나쁘지 않은 말만 둘러대는 것입니다. 그건 의례적인 덕담이지 진정한 의미에서 축복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축복은 말에 있지 않고 앎에 있습니다. 야곱은 누구보다 아들들을 잘 알았던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독설같은 한마디도 축복인 것입니다.
“다 잘 될 거야”라는 덕담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일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인생 그 따위로 살지 말아라”가 축복일 수 있습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시 119:71)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이시기에, 그 분이 주신 것이라면 고난이라도 선물이고 축복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