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길의 시네마 올레길] ‘남아 있는 나날’

 

훌륭한 영화 제목입니다. 한국어 번역이 탁월합니다. ‘세월의 유산’으로 직역했으면 얼마나 밋밋할뻔 했을까요. 2017년도 노벨문학상을 받은 일본계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3번째 소설 <남아 있는 나날>이 원작입니다. 참 인상 깊었습니다. 소설로 읽지 못하고 영화로만 만났습니다.

영국의 정통 귀족사회 시스템을 돋보기로 보듯 묘사가 생생합니다. 거기에 20세기 영국의 정치와 2차세계대전에 응전하는 유럽의 구도가 얹혀집니다. 명문 귀족 달링턴 경의 소왕국이 유지 관리되는 내공을 품격있는 문체와 화면으로 잘 보여줍니다.

1993년 제작. 감독 제임스 아이버리. 고풍스러운 영국식 <TV문학관> 같습니다.

34년간 귀족 대저택 집사장으로서 삶을 매진한 중인계급 남자 스티븐 (안소니 홉킨스).

그는 충성+정확+완벽+무오류+완고함으로 생을 일관합니다. 부모의 임종마저 놓치며 끝간데 없는 직업의식으로 철두철미하게 살아갑니다. 후회없는 삶이 어디있을까. 수석 가정부로 일했던 ‘미스 켄튼'(엠마 톰슨)이 늘 가슴에 얹힙니다.

그녀를 향한 연모를 내내 감추고 바라만 보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미스 켄튼마저 집사장의 경직된 연정에(남자의 무심함) 지쳐 떠나가 버립니다.

늦은 황혼에 이르러서야 그리운 켄튼을 추억합니다. 홀로 있는 현재의 그녀에게 다가가 봅니다.

다가온 노년의 사랑. 그 기회마저 용기가 없어 잃어버리고 맙니다. 한 남자의 표현하지 못 하는 사랑의 시간.

색 바랜 누런 종이빛 에세이 노트같은 사랑. 거실로 들어온 길 잃은 비둘기를 창문을 열어 제 갈 길로 인도하는 스티븐스. 모든 것은 결코 회복되지 않고 흘러가 버립니다.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세월이었습니다.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해야 함을 뼈저리게 느낀 걸까요. 여운을 길게 끌고 간 엔딩 씬, 문학의 향기 가득한 가을 시네마. 시간이야말로 문학을 살찌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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