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 죽음의 바다’…”이순신이 일본 열도를 반격 섬멸했다면”
# 적이 나의 강토와 연안을 내습했으므로 적이 전쟁을 끝내기를 원한다면 군대를 거두어 돌아가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온 국토를 갈아엎고 돌아가는 적을 온전히 살려서 돌려보낼 것인지, 종자를 박멸해서 시체로 바다를 덮을 것인지는 적이 아니라 나와 내 함대가 결정할 일이었다. 적은 귀로의 바다 위에서 죽음을 통과해야만 돌아갈 수 있을 것이었고 그 바다에서 적의 죽음과 나의 죽음은 또 한번 엉킬 것이었다.
# 노량의 물결은 사나웠다. 적들은 바다를 뒤덮고 달려들었다.검은 깃발의 선단이 서쪽 수평선을 넘어왔다.광양만을 떠난 순천의 적들이었다. 남쪽 수평선 위에 붉은 깃발들이 무수히 나타났다. 남해도에서 발진한 적 육군의 보충대였다. 내가 닿을 수 없었던 먼 적들이었다. 검은 깃발의 적과 붉은 깃발의 적 사이로, 흰 깃발의 선단이 돌격 대형의 장사진을 펼치고 다가왔다. 사천의 적들이었다. 적들의 살기는 찬란했다. 적선에 가려 수평선은 보이지 않았다. 내 앞에 드러난 적의 모든 것이었다. (김훈 <칼의 노래> 부분 발췌)
김한민 감독의 이순신 영화 3부작이 완결됐다. <명량>(2014) <한산: 용의 출현>(2022) <노량: 죽음의 바다>(2023). 10년에 걸친 집념과 집중력이다.
노량해전(露梁海戰)은 임진왜란(1592∼1598) 최대 최후의 해상 전투. 1598년 12월 16일(선조 31년)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명나라 연합수군이 경상남도 남해현 노량해협 일대에서 일본의 함대와 싸운 전투다. 조선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조선 원군으로 참가한 명나라 수군 사령관 진린, 일본 수군 총사령관 시마즈 요시히로, 이 3자 사이의 팽팽한 서사가 180분간 펼쳐진다.
100분간 이어지는 해상 전투 장면은 압권이다. 조선, 명, 일본 3개국 군선과 수군이 해상 난전, 선상 백병전, 유혈 혼전을 벌인다. 야간 해상전투 시퀀스 제작 테크닉은 세계에 자랑할 만하다. 원경과 근경을 긴장감있게 잡아채는 카메라는 노련하다. ‘아비규환의 전장’ 사운드에 귀가 멍멍할 뿐.
서울 세종로 사거리 횡단보도에 서서 이순신 동상을 올려다 본다. 굳은 표정 지으며 화석화된 그가 한 남자로 다가온다. 그는 버겁고 힘들어하며 때론 굵은 눈물 뿌리는 한 조선 남자. 노량대첩 말미 우왕좌왕하는 왜적을 조선 수군의 맨앞 선단을 이끌며 끝까지 몰아 붙이는 충무공. 직접 북을 치며 돌격을 독려하는 그는 이미 자신에게 죽음의 神이 가까이 다가왔음을 알았을까.
그는 밖으로 국격의 기세는 떨치지 못하고 안으로 곪아만 가는 나라의 오랜 지병을 가장 먼저 안타까워한 조선 왕조의 진정한 신민臣民이었다. 젊은 시절, 조선 북방 변경을 지켜내며 몸소 체험한 뼈저린 진실들. 단 한번의 전투도 패배를 허용치 않았던 주도면밀의 군인정신.
충무공은 결국 조선 중기를 기점으로 나라와 왕조가 침몰할 위기를 수습해놓고 자신의 죽음을 ‘정치적 완결행위’로 마무리 짓고자 했다. 살아남은 자신이 남해바다 대승리로 말미암아 (미구에 닥칠) 정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일 것을 예견한 듯하다. 장군은 애당초 그 싹을 잘라 버리는 대결단을 죽음으로써 결행한다. 성웅의 기나긴 대업은 이렇게 완결된다.
선병질에 걸린 듯한 선조임금의 끝없는 의심에 힘겨워했다. 당쟁과 문약에 빠진 조정이 남쪽으로 보내는 얄팍한 술수를 그는 온몸으로 부딪쳐야 했다. 남해 밤바다에 오롯이 서있는 한 사나이. 가슴 속 칼날이 쉴 새 없이 징징 울어댄다. 몸에 와닿는 시대의 채찍질에 온 몸의 상처가 벌겋게 달아오른 초로의 남자. 푸르스름한 그의 눈빛이 허무하게 서늘하다. 그의 조국은 가진 것이 너무 없었다.
외진 섬나라로 괄시받던 일본은 이미 그 옛날의 왜구족이 아니었다. 조선보다 먼저 서구의 총과 화약을 받아들여 수백년 일본 열도 내전의 역사를 종료. 이른바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쇼군시대가 문을 연다. 오다 노부다가 –> 도요토미 히데요시 –>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이어지는 무武의 기상은 다이묘(지방영주), 사무라이, 무역상인들의 이해관계와 맞아 떨어져 끊임없이 대외지향적 에너지로 분출된다.
천자라 자칭하는 중화의 땅, 중국이 ‘수비형 거대 제국’이라면 일본은 기회만 되면 밖으로 눈을 돌리는 ‘공격형 제국’이다. 바로 조선반도가 그들의 탈출로이자 대륙 침탈로 역할을 하게 된다. 결국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의 저력에 밀려 패퇴하고 말았지만 일본 사무라이군단은 메이지 유신체제를 통해 압도적 화력으로 재무장한 다음, 임진왜란 종료 후 300여년만에 다시 조선을 조롱한다. 조선 온 국토, 온 백성을 또다시 유린하고 병탄시키고 만다. 조선은 처참한 식민지로 전락함과 동시에 소멸된다.
단 한번도 온전하게 타 민족을 다스리고 제압해본 적이 없는 민족. 안으로 곪아터지면서 ‘사대선린의 순정’으로만 외교를 다듬어왔던 소심한 순진주의. 나라 대 나라, 민족 대 민족은 철저히 물리적 힘과 정신력의 대결일 뿐. 군주가 미망하면 필연코 백성이 피를 본다. 울타리 내부에서만 안온하고자 하는 자에게 다가오는 건 종국에 밖으로부터의 공포와 외부로부터의 침탈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