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앞두고 운명처럼 마주친 두 여자 ‘캐롤’…“우린 서로에게 놀라운 선물”
타이틀 : 캐롤 (2015)
감독 : 토드 헤인즈
주연 : 케이트 블란쳇(캐롤 에어드), 루니 마라(테레즈)
[아시아엔=김용길 <아시아엔> 편집위원, 동아일보 기자] “우린 서로에게 놀라운 선물”
크리스마스를 앞둔 1952년 미국 뉴욕. 사진작가 지망생 젊은 테레즈(루니 마라)는 뉴욕 다운타운 백화점 장난감 코너 말단 판매원이다. 그녀 앞에 상류층 가정주부 캐롤(케이트 블란쳇)이 나타난다. 캐롤은 기품이 가득 밴 의상과 또박또박 설득력이 서린 말투, 지적인 눈빛과 매력적인 빨간 입술로 다가온다. 테레즈는 매장에 선 캐롤의 동선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캐롤이 다가와 딸에게 선물할 장난감을 추천해달라고 말을 건넨다. 서로를 마주보는 두 사람의 시선. 운명적 만남의 시초다. 거부할 수 없는 끌림의 출발지점이다. 떨림과 설렘으로 가득 찬 사랑의 첫 프롤로그.
캐롤은 현재 남편과 별거중인데 딸의 양육권을 놓고 이혼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우아하지만 때론 저돌적이고 동시에 불안한 눈빛이 캐롤에게 묻어있다. 명문가 출신 남편은 자신의 남성성을 받쳐주는 보조적인 위치로 아내를 자리매김한다. 아내 캐롤의 감성세계엔 무지한 듯 보인다. 캐롤은 겉으로만 화목한 가정의 익숙한 전업주부 역할을 해내는 ‘트로피 와이프’였던 것이다. 캐롤의 외로움이나 상실감은 여기에서 연유한다.
테레즈는 평범하고 무난한 일상의 이십대 직장여성. 젊고 순수하지만 여리기만 하다. 자신의 재능 계발을 위해 한 번도 도전해보지 못했다. 결혼하자고 졸라대는 남자친구가 있지만 미래의 일엔 자신이 없다. 관계를 풀어나갈 때 한번도 ‘NO’라고 당당히 외쳐보지 못했다. 파리로 여행가자며 남자친구가 계획을 세워도 시큰둥하다. 남자친구는 사진을 찍고 싶은 테레즈의 속마음을 읽지 못하고 있다.
토드 헤인즈 감독의 <캐롤>은 1950년대 계급과 사회적 위치가 다른 두 여성을 한곳에서 만나게 한다. 영화는 파격적 스캔들, 선정적인 사건 없이 두 사람이 섬세한 감정의 결을 주고받는 과정을 담담히 그리고 있다. <캐롤>은 ‘퀴어영화’(性소수자를 다룬 영화)로 분류된다. 사랑하는 주체가 여자와 남자가 아니라 여자와 여자라는 점이 독특하지만, 성적 지향과 성적 취향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동성애를 부각시키지 않고 ‘사랑의 한 형태’로서 전개된다.
“하늘에서 떨어진 것 같이 신기한 사람이야” 두 사람이 처음으로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캐롤은 테레즈에게 말한다. “우린 서로에게 놀라운 선물이야” 만남과 대화가 깊어갈수록 테레즈에겐 캐롤이 ‘첫사랑’이 되고 캐롤에게는 테레즈가 ‘마지막 사랑’이 되어가고 있음을 직감한다. 캐롤은 자발적으로 연인의 멘토가 된다. 테레즈가 무심코 흘린 사진작가의 꿈을 자신의 가슴에 새겨놓고 최고의 카메라를 구입해 선물한다. 이젠 마음껏 세상의 표정을 필름에 담아보라고 한다. 함께 나선 여행길에서 테레즈는 자신의 연인 캐롤의 깊고도 서늘한 표정을 찰칵 담아둔다. 캐롤과 테레즈는 서로 상대의 갈망을 알아챈다. 동시에 상대를 배려하되 자신만의 세계도 잃지 않는다.
1950년대 미국에서 동성애는 비윤리적 행위였고 차라리 정신적 질환이었다. 캐롤에게 남편이 아닌 동성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딸을 양육할 권리가 박탈당하는 것이었다. 사랑이 죄가 되는 순간, 이 불합리한 편견으로 인해 두 사람은 이별하게 된다. 2015년에야 미국 전역에서 동성결혼이 합법화됐다. 이보다 60년이 앞선 시대에 캐롤과 테레즈는 자신을 속이는 삶과 진실하고자 하는 삶 사이에서 당당한 선택을 펼쳐 보인다.
드러내지 못하는 사랑을 온몸으로 부딪치는 영화는 객석의 조마조마한 마음을 기쁘게 위무한다. 가정주부 생활에서 벗어나 전문직으로 자신의 삶을 곧추 세우고 싶은 캐롤. 그녀의 상실감을 오롯이 이해하게 된 테레즈. 두 사람이 펼쳐갈 미래가 객석을 따뜻하게 한다. 숨 막힐 듯한 엔딩 신이 기다리고 있다. <캐롤>은 눈빛으로 주고받는 러브스토리다. 그 눈빛 속에는 이글거리는 폭풍이 숨 쉬고 있다. “인생에 단 한번 오직 그 사람만 보이는 순간을 느껴보셨나요?”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자전적 소설 <캐롤>이 원작이다. 추리소설 대가의 유일한 로맨스 소설이다. 멜로드라마의 거장 토드 헤인즈 감독은 사람 사이의 내밀한 관계, 지극한 감수성을 시각화하는 역량이 탁월하다. 1950년대 미국 뉴욕의 풍경이 디테일한 소품과 미장센 사이에서 생생하게 뿜어져 나온다. 두 주인공 케이트 블란쳇과 루니 마라는 ‘21세기 멜로드라마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명품 연기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