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빙 빈센트’, 그림으로 세상에 다가서고 싶었던 ‘아웃사이더’ 빈센트 반 고흐

<러빙 빈센트> 영화 포스터

[아시아엔=김용길 매거진N·아시아엔 편집위원, 동아일보 기자] “그림을 그리는 일은 내게 구원과 같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더라면 지금보다 더 불행했을 테니까. 그림을 그리는 동안 내 안에서 전에는 갖지 못했던 색채의 힘이 꿈틀대는 것을 느꼈다. 그건 아주 거대하고 강렬한 어떤 것이었다.”(빈센트 반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 일부)

‘태양의 화가’, ‘영혼의 화가’라 불리는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는 동시에 ‘불운의 천재화가’ ‘광기의 화가’의 아이콘이기도 하다. 1880년 스물일곱의 늦은 나이에 화가의 길로 들어선 고흐는 1890년 7월 자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800점이 넘는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그가 살아 있을 때 팔려나간 그림은 단 한 점뿐이었다. 지독한 가난과 우울증은 짧은 생애의 고흐를 한평생 괴롭혔다. 네덜란드 출신 젊은 예술가 삶은 너무나 고되고 팍팍했다.

외롭고 쓸쓸하게 죽어갔지만 죽은 뒤에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로 꼽히는 고흐는 인상주의와 현대모더니즘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한다. 당대의 화가들과 전혀 다른 붓 터치로 오늘날 현대 미술의 씨를 뿌렸지만 동시대인들에겐 인정받지 못했다. 고흐의 생동감 넘치는 작품들이 펄펄 뛰는 물고기처럼 다가왔다. 바로 세계 최초 유화 애니메이션 영화 <러빙 빈센트>다.

상영시간 95분 내내 고흐의 화풍 그대로 구현한 고흐의 세계가 펼쳐진다. 마치 고흐가 21세기에 다시 태어나 19세기 그 자신의 신산한 삶과 격정의 작품을 재현하는 듯하다. 코비엘라와 웰치먼 두 감독은 4000명의 화가를 오디션해 107명을 선발했고, 이들이 2년 동안 6만2450점의 유화를 직접 그린다. ‘귀가 잘린 자화상’ ‘아를의 포룸 광장의 카페 테라스’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 ‘피아노에 앉은 가셰의 딸’ ‘아를의 밤의 카페’ ‘폴 가셰의 초상’ ‘밀밭’ ‘씨뿌리는 사람’ 등 고흐가 남긴 마스터피스 130여 점을 스크린에 고스란히 재현했다.

<러빙 빈센트> 한 장면

이제까지 경험한 적 없는 세계 최초의 유화 애니메이션은 압도적인 비주얼을 객석에 선사한다. 붓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고흐의 역동적 화풍이 관객 가슴 속으로 벼락처럼 파고든다. 애니메이션이지만 영화와 애니메이션의 제작방식이 혼용되었다. 실제 배우들이 먼저 연기를 하고 이 영상을 다시 100여명의 화가들이 유화로 그려 이를 일일이 영상 편집했다. 실제 배우들의 연기 위에 그림을 입히는 일종의 로토스코프(rotoscope) 방식이다.

영화 장면이 전부 반 고흐 작품의 복제인 까닭에 관객은 관람 내내 네덜란드 ‘반 고흐 미술관’에 직접 와있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것도 엄청난 극장 스크린 사이즈의 미술관에···. 이게 바로 영화 <러빙 빈센트>가 관객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자 축복이다. 이래서 기획부터 영화 개봉까지 10년이 걸렸다.

고흐의 터치가 생생한 화면은 고흐의 화풍이 왜 ‘모던’한가를 증명해낸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색색의 결이 꿈틀거리고 일렁이는 곡선 화풍으로 나부낀다. 밀밭, 해바라기, 사이프러스나무, 별이 빛나는 밤, 고흐의 심연에 소용돌이치던 격정이 격랑으로 출렁거린다. 순간적인 빛의 움직임을 담아서 마음속에 새겨지는 느낌을 표현한 고흐의 화폭은 자신만의 색채와 독특한 화풍으로 자리잡는다. 희석하지 않는 걸쭉한 물감으로 입체적인 붓 터치를 구사한 고흐 특유의 화법은 후대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러빙 빈센트>는 작품소개를 곁들이며 고흐의 일대기를 평면적으로 펼치지 않는다. 권총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반 고흐의 죽음에 대한 의혹을 풀어가는 ‘미스터리 스릴러’의 형식을 취한다. 스토리는 프랑스 프로방스지방 아를에서 시작된다. 고흐의 주요 작품들은 삶의 마지막 시기인 아를 시절(1888년)에서 시작하여, 정신병동에 입원해 있던 생 레미 시절(1889년), 37살에 자살한 오베르 시절(1890년)에 이르기까지 3년 동안에 집중적으로 그려진다.

고흐는 친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자주 썼다. 삶에 마지막 위안을 주고 경제 지원을 해준 이가 바로 동생 테오다. 800통 넘는 반 고흐의 편지 가운데 테오에게 보낸 편지가 668통에 이를 정도로 둘의 관계는 각별했다.

그는 이웃인 우편배달부 조제프 룰랭의 가족들과 친했다. 룰랭의 가족은 전부 고흐 초상화의 모델이 된다. 고흐가 죽은 지 1년 뒤 시점에서 출발하는 영화의 내레이터는 룰랭 집안의 큰아들 아르망이다. 우편배달부 룰랭은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쓴 마지막 편지를 아직 배달하지 못했는데, 큰아들에게 대신 전달하라는 임무를 내린다. 그리곤 한 가지 의문을 덧붙인다. 고흐가 죽기 불과 6주 전 자신에게 보낸 편지에서 너무나 편안한 상태라고 토로했었는데, 갑작스런 자살이 믿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청년 아르망은 동생 테오를 찾아가 편지를 전하려다 테오마저 죽은 것을 알고 고흐와 교류했던 주변인물을 찾아간다. 아르망이 만난 사람들은 고흐의 초상화에 등장한 실제 인물들이다. 화구점 주인 탕기 영감, 오베르의 하숙집 딸 아들린, 오베르의 주치의 폴 가셰 박사, 가셰 박사의 딸 마르그리트 등이다.

“진정 자살하려 했다면 왜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지 않고 복부를 쏴 이틀 후에 사망했을까” 자살이 아닌 타살의 흔적은 곳곳에서 노출됩니다. 어떤 이는 고흐를 ‘악마’ ‘미치광이’로, 또 다른 이는 전혀 다르게 천생 ‘성실한 예술가’로 기억한다. 흑백화면으로 처리한 여러 플래시백을 통해 고흐의 정체성이 한 조각 한 조각 관객에게 다가온다.

목사인 아버지와 불화한 심약한 외톨이, 자신의 귀를 자른 우울과 광기, 현실에 무력하기만 한 예술에 대한 극도의 불안감, 세상과 어울리지 못한 아웃사이더···. 이런 예민한 삶의 편린 속에서 오롯이 다가오는 것은 고흐의 그림을 향한 열정이다. 어떻게든 세상과 화합하고 소통하고자 애썼던 한 아티스트의 격정이 다가온다.

살아생전 단 한 점 작품만 팔린, 처절하게 가난해서 어쩌면 죽음을 자처할 수밖에 없었던 불우한 예술가의 생애가 절절하게 파도친다. ‘인간 고흐’는 광인이 아닌 그림으로 세상에 다가서고 싶었던 앳된 예술인으로 밝혀진다. 돈 맥클린의 노래 ‘빈센트’가 흐르는 엔딩 크레딧도 놓치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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