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일동의 소리 집중⑧] 묻고 또 물어 이치를 깨닫다

홀로 재미진 다람쥐 <사진 배일동>

독공은 여러 법제의 소리를 성실하게 익힌 뒤, 깊은 산중이나 혼자만의 한적한 공부 장소를 찾아 배운 소리를 더 자세히 다듬는 일이다. 더 나아가 자신만의 고유한 생각과 정감이나 뜻을 발견하고, 그러한 것을 소리에 덧붙여 자기만의 덧음을 내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다.

독공은 성실함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격물치지(格物致知)하는 치열함이 있어야 한다. 소리만 쳐다보고 공부하면 우물 안 개구리의 어리석음을 벗어나지 못한다. 산속에 있으면 정작 그 산을 못 본다고 하지 않던가. 산을 제대로 보려면 저 멀리 너른 들녘에서 보아야 하듯이, 소리 공부는 소리가 품고 있으며 소리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세상사의 인문(人文)으로 보아야 한다.

성음이 뭔가? 성음은 세상 만물의 온갖 사정을 낱낱이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좋은 성음을 얻으려면 인문의 표정과 정신을 읽어야 한다.

독공은 격물치지이다. 격물이란 자신이 모르는 것을 끊임없이 묻고 탐구하여 깨쳐나가는 공부 과정을 말한다. 그것은 머리로만 궁리해서 될 일이 아니다. 우리가 대하는 모든 것이 격물의 대상이다. 이러한 즉물(卽物)들을 직접 마주하고 체험하면서 연구하고 궁리하는 과정이 격물이다. 치지란 그렇게 얻은 이치들을 자기 내면의 깊은 성찰로 더욱 정밀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소리로 말하자면, 발성의 원리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하는 명제에 대해 의심을 품을 때, 그 발성이 격물의 대상이 된다. 발성은 어떠한 원리로 이루어질까? 발성과 호흡은 어떤 관계일까? 그리고 호흡은 어떻게 흐를까? 이러한 의심의 과정 중에, 그 즉물들을 붙들고 철저히 분석하고 캐물어가는 것이 격물이다.

치지란 격물을 하면서 얻은 체험과 이치를 내면적으로 더욱 정밀하게 추론하여 확고부동한 앎에 이르는 것이다. 말하자면 판소리 발성은 다양하지만, 통성 발성을 위주로 하며, 어단성장(語短聲長)과 억양반복(抑揚反覆)의 기법을 통해 선율과 장단을 확정하고, 상하원근과 장단대소를 통해 성음을 묘사한다.

즉 구체적인 발성은 우리의 말법에 기인한다는 이치를 다각적으로 격물하여 이치의 합당함을 소리로 밝혀내어 확연한 앎에 이르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격물치지로써 소리를 새롭게 짜나가야만 공부에 진척이 있고 확실히 체득하는 기쁨이 생긴다.

격물치지가 안 되면 예술의 격조는 결코 우아하고 기품 있게 나올 수 없다. 결국 격물치지란 실기와 이론의 겸비를 말한다. 그러므로 격물치지란 만물의 이치를 통해 내재적 의식의 상태를 완전하게 하는 것이다.

호흡이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는 과정이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바지만, 어떤 이들은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흘러서 소리가 이루어지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그냥 소리를 한다. 하지만 그러한 원리와 이치를 고민하고 연구해야만 비로소 안과 밖이 함께 빛나는 소리를 할 수 있다.

그저 밥 먹고 잠자는 시간 빼고 소리만 열심히 한다고 해서 독공을 잘한다고 할 수는 없다. 자기가 가는 소리 길이 어딘지, 또 어떻게 가고 있는지를 분명히 인식하면서 가야 한다. 그걸 모르면 명상과 독서를 통해 얻은 바를 자기가 실천하고 있는 소리에 접목하여 대조해보면서 스스로 깨쳐야 한다.

천부적으로 타고난 소리꾼도 예외는 아니다. 타고난 사람은 예술적 감각과 표현이 조금 앞선다는 것뿐이지, 내면적 성숙까지 완전한 것은 절대 아니다. 재주의 우열이란 깨달음의 경지에서 보면 오십보백보다.

돈오점수(頓悟漸修)라 하지 않던가. 깨달은 뒤에도 꾸준히 닦아야 하는 게 도의 세계이다. 그래서 자강불식(自强不息)이라 하는 것이다. 물은 너른 바다에 이르러도 끊임없이 움직이며 자신의 소명을 다해 출렁거린다. 이것이 대자연이고 우주 만물의 섭리이다.

오히려 재주를 타고난 사람은 격물치지에 매우 인색하다. 특별히 고심하지 않고 묻지 않아도, 애써 연습하지 않아도 단박에 잘해내니 격물치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그런지 몰라도 간절함이 부족하다. 그런 점에서 보면 소리를 타고났다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둔재일지라도 쉼 없이 갈고닦아 그 이치를 철저히 알아가면, 알게 모르게 알이 차고 여물어 언젠가는 활통한 경계에 이를 수 있다.

독공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또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궁극의 깨침을 위해 진정한 자기 영혼의 소리를 찾고자 하는 간절함을 품은 자만이 할 수 있는 소리꾼의 처절한 수행이다. 물루(物累)와 정루(情累)의 하찮은 세욕들을 과감히 제쳐두고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는 자만이 득음의 경계를 맛볼 수 있다. 소리가 바위를 뚫으니, 이게 모두 정성(精誠)의 덕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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