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인 ‘묘비명’에서 배우는 ‘여생’ 잘 살아내는 법
여생(餘生)이 얼마나 남았을까? 필자처럼 거의 다 산 사람도 있고, 앞날이 창창한 분도 있다. 얼마나 더 살지는 알 수 없지만 살 때까지 모든 일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정열적으로 살다가 떠나기 전에, 내생과 후생들을 위하여 묘비명(墓碑銘)이라도 미리 써 놓고 떠나면 어떨까?
필자는 가면 화장해 덕산재에서 멀지 않은 선산에 묘지를 쓰지 말고 그냥 뿌리라고 유언을 해두었다. 묘비명의 경우 굳이 쓰라고 하면 이렇게 쓰겠다.
“여기, 모든 일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정열적으로 살다가 떠난 덕산 김덕권(길호) 여기에 뿌려지다.”
세상을 멋지게 살다간 유명인사들의 묘비명을 소개한다. 첫째, 백년전쟁 때 영국의 태자였던 에드워드의 묘비명이다.
“지나가는 이여! 나를 기억하라. 지금 그대가 살아 있듯이, 한때는 나 또한 살아있었노라. 내가 지금 잠들어 있듯이 그대 또한 반드시 잠들리라.”
둘째, 유럽을 정복한 알렉산더대왕의 묘비명.
“내가 죽거든 나를 땅에 묻을 때, 손을 땅 밖으로 내놓아라. 천하를 손에 쥐었던 이 알렉산더도 떠날 때는 빈손으로 갔다는 것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 주기 위함이다.”
셋째, 헨리 8세의 딸로서 왕위에 오른 엘리자베스 1세의 묘비명이다.
“오직 한순간 동안만 나의 것이었던, 그 모든 것들.”
넷째, 임마누엘 칸트의 묘비명을 소개하기 전 일화를 보자.
칸트는 수십년 동안 규칙적으로 산책했던 것으로 유명했다. 사람들은 그가 산책하는 것을 보고 시간을 짐작했다고 한다. 그랬던 칸트도 임종이 가까워지자 침대에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먹을 수도 없었다. 하인은 칸트가 목이 마를까 봐 설탕물에 포도주를 타서 숟가락으로 조금씩 떠먹였다.
어느 날, 칸트는 더는 그것을 마시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이제 그만”이라고 말했다. 그것이 칸트가 남긴 마지막 말이다.
다섯째, <그리스인 조르바>의 저자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여섯째, 미국의 여성작가 제인 로터.
“삶이란 선물을 받았고, 이제 그 선물을 돌려주려 한다.”
그녀는 남편에게 쓴 유언에 “당신을 만난 날은 내 생에 가장 운 좋은 날이었다”고 했다. 죽음 앞에서도 의연하고, 살아 있는 사람을 배려하는 모습이 감동을 준다.
일곱째, 중국의 동산 선사의 묘비명.
“이생은 멋진 여행이었다. 다음 생은 어떤 여행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동산 선사는 “살아 있을 때는 철저하게 삶에 충실하고, 죽을 때는 철저하게 죽음에 충실하라”고 가르쳤다.
여덟째, 버나드 쇼.
그는 1950년 사망할 때까지 극작가·평론가·사회운동가 등의 폭넓은 활동을 했다. 1925년 노벨문학상도 받았다. 당시 인기 절정이었던 무용가 이사도라 덩컨이 “저와 같이 뛰어난 용모의 여자와 당신처럼 뛰어난 자질의 남자가 결혼해 2세를 낳으면 훌륭한 아기가 태어날 것”이라며 구혼의 편지를 보내왔다. 버나드 쇼는 “나처럼 못생긴 용모에, 당신처럼 멍청한 아기가 태어날 수도 있지 않겠소?”라며 거절했다.
이렇게 오만함과 익살스러움으로 명성을 떨쳤던 버나드 쇼는 94세까지 장수하며, 자기의 소신대로 살았다. 하지만 그가 남긴 묘비명이 충격적이다.
“내 우물쭈물하다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
그는 동서양에 걸쳐 명성을 떨치고, 의미 있는 삶을 살다간 문인이요, 철학자며, 노벨상까지 받은 인물. 이런 사람이 자기의 삶을 되돌아보며 “우물쭈물했다”고 자평한 것이다.
세월이 유수같이 흘러가고 있다. 남은 시간은 더 빨리 지나갈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영원히 살 것처럼 살다가 임종이 다가와서야 후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