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충북대 재직 시절과 곽충구 교수의 추억

곽충구 교수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삶에서 직장이나 모임 등 어떤 조직생활을 하게 마련이다.
적게는 몇 명, 많게는 수십 명 군집 속에서 지내노라면 별별 유형을 두루 만나게 되어있다.

기질과 심성이 비슷해서 곧바로 소통이 되는 유형, 동일계열이 아니어서 사사건건 부딪치는 유형, 그저 그렇고 그런 무덤덤한 유형 등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지는데 대개 짧은 시간만 겪어봐도 곧 파악이 가능하다.

이런 파악은 매우 중요한 것이어서 조직 내부의 여러 일들, 이를테면 무슨 사안을 토론하거나 사람을 뽑는 경우 신경을 곤두세워 상대를 공격하고 제압하기도 한다.

나는 몇 군데의 대학교를 거치며 교수사회의 조직성에 대한 온갖 경험을 하였다.
그 소감은 대개 환멸과 추태로 가득했던 것 같다. 내 나이 30대 시절에 몸 담았던 충북대는 국립대학으로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다. 새로 발족한 학과에 10명의 교수가 부임했는데 나 혼자 지방대 출신이고 나머지는 모두 서울대 졸업생들이었다.

그 고립감이나 외로움은 때로 절해고도 같았다. 노골적 무시나 왕따 같은 비열한 응대도 있었다. 교수별로 돌아가며 출제하는 교양과목 시험의 경우 내 출제의 수준을 대놓고 의심하는 자도 있었다.

가장 희한한 경우는 신임교수 공채가 있을 때이다. 대부분이 서울대 출신이었던 교수진 중 어느 누군가는 아주 대놓고 우선 ‘큰집’에 물어봐야 한다고 공공연히 말했다. 그 ‘큰집’論이란 서울대의 해당학과에 적절한 인물을 보내달라는 사전 위탁절차이다.

타교 출신인 나를 완전무시하는 처사였다. 지방대 출신 하나쯤은 안하무인으로 여기는 듯했다. 급기야 최종결정이 가까워질 무렵, 첨예한 대립으로 날카로운 분쟁이 시작되는데 주로 인문대와 사대 양대 계열의 싸움이다. 그야말로 참고 보기가 목불인견이다.

이처럼 서울대는 인문대와 사범대 출신들이 서로 끊임없이 불화하는 숙적이자 앙숙이었다. 인문대는 사범대 출신에 대해 우월감으로 무시하고 사범대는 피해의식으로 곤두서 있었다. 서로의 지분을 선점하려고 혈안이 된 꼴이었다.

이런 싸움을 여러 번이나 지켜보았다. 이게 과연 이 나라 최고대학이라 자랑하는
민낯의 수준인가 생각하면 한심하였다.

곽충구 교수는 2018년 제16회 일석국어학상을 수상했다. 한국방언학회장을 지낸 곽 서강대 명예교수는 북한 방언과 중앙아시아 이주 한민족 언어 연구자로 함북 6진에 속하는 회령, 종성, 온성, 경원, 경흥에서 사용한 방언을 조사하는 데 힘썼다. 그는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함북 육진 방언의 음운론’, ‘함북 북부 지역어 연구’, ‘문학 속의 북한 방언’을 쓰고 ‘방언학 사전’을 편집했다. 

사범대 출신의 곽충구 교수는 나와 동갑으로 충남 아산 출생이 아닌가 한다. 다소 늦게 부임했는데 몇 마디 대화를 나눈 뒤 그가 정의, 평화, 진실, 양심을 지지하는
의기남아(義氣男兒)인 줄 곧바로 알았다.

농담도 썩 즐기지는 않고 고지식한 듯 보이지만 그렇다고 아주 갑갑한 스타일도 아니었다. 언제 만나도 편하고 무관하고 특히 학과에 분쟁이 생길 때면 나와 곽 교수가 나서서 복잡하게 얽힌 문제를 정리하고 해결했다.

그런 곽 교수를 항상 불편히 여기던 인문대 출신 후배 아무개 교수와 늘 사사건건 대립하고 싸움판이 벌어졌다. 학과회의에서 심지어 쌍욕과 멱살다짐까지도 있었다. 그 후배교수는 진작 고인이 되었다. 출근해서도 항상 주식투자에 정신없이 골몰하던 은행원 출신의 특이한 품성이었다.

나도 곽 교수도 비슷한 시기에 각각 다른 대학으로 옮겨서 떠나갔다. 나는 영남대로 곽 교수는 서강대로 갔다. 종종 인편에 안부를 서로 전하다가 그 연락마저 끊어진지 오래 되었다.

우리 둘 다 정년을 하고 이후 시간을 보내는데 곽 교수는 그간 무탈하신지 궁금하다. 쌍둥이 아들과 몸이 불편하신 부인 소식도 궁금하다. 모두 무탈하게 잘 계시기를 기원한다.

곽충구 교수가 이동순 교수에게

李 東 洵 仁兄께

다사다난했던 신미년도
역사의 저 편으로 사라져버리고
임신(壬申)의 새해가 밝아왔습니다.
새해에도 더욱 건강하시고
댁내에 평안과 만복이 깃들기를 기원합니다.
부인께서도 안녕하시옵고
응(鷹) 군과 단비 씨도 잘 있겠지요.
보내주신 시집을 받고 곧 소식 드린다는 것이
차일피일 미루다가 오늘 신년 벽두에야
붓을 잡게 되었습니다.
불민하고 게으른 소치이오니
너그러이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어리석은 사람에게도
잊지 않고 귀한 옥서를 전해주시니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올려야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연구실 일우(一隅)에 걸려있는
이형의 자필시 ‘박달재를 넘으며’를
뒷짐을 지고 서서 바라보며 상념에 젖는 것이
저에게는 하나의 습관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그곳 대구에서의 생활은 어떠하신지요?
아무래도 고향 근처로 다가섰으니
그리고 가까운 친지들 곁으로 옮기셨으니
마음이 한결 유여(有餘)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이곳으로 옮겨온지 네 해가 됩니다만
아직까지도 이방인이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성격도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탓도 있겠지만
웬지 삭막하기만 한 서울 생활이
마음과 몸을 옥죄는 것만 같은
답답한 심사 때문인 것 같습니다.
칼날 같은 준엄함과
때로는 밝고 환한 웃음을 지닌
이형 같은 사람이 곁에 없다는 것도
한 이유가 되겠지요.
일전에 아무개 씨를 통해서 형의 소식도 들었습니다.
대구에서 올라온 사람들의 얼굴에서
형의 얼굴이 먼저 떠올라
안부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서울에 오시면 소식 주시기 바랍니다.
임신년에는 더욱 넓게 터갈이를 하시고
옹골찬 씨를 많이 뿌리시기 바랍니다.
더욱 더 건강하시고 만사형통하시기를 빕니다.
또 소식 드리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1992년 1월 3일

우제(愚弟) 곽 충 구 드림

곽충구 교수가 이동순 교수에게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