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제자 권은정의 눈부신 활동에 크나큰 박수와 성원을
흘러간 20대 후반, 일찍이 전문대학 교수가 되어서 맞이한 새로운 계절은 한없이 싱그러웠다. 출근해서 만나는 제자들은 나이 차이도 그렇게 나지 않는 처녀들이었고 그들은 새로 부임한 미혼의 총각교수를 스스럼없이 응대하며 장난스럽게 다루기도 했다.
정식 직함은 안동간호전문대학 전임강사, 내가 여기서 맡은 과목은 교양국어, 교양한문, 한국사 등이었고 가정학 강사가 출산 때문에 쉬게 되었을 때 용감하게 대강(代講)을 하기도 했다. 국문학 전공이 가정학 강의까지 했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실소(失笑)를 머금는다.
그 무렵 이웃 안동대학에서 출강 요청이 왔다. 교양강좌로 문학개론을 맡아달라고 했다. 기꺼이 수락하고 강의준비를 철저히 해서 출강했다. 수업이 끝날 때마다 한 여학생이 활짝 웃으며 다가와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나는 성심성의껏 설명을 해주었다. 그 여학생은 거의 매시간 수업 후 질문을 했다. 지금 되짚어보면 질문이 목적이 아니라 나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 게 목적이었다는 그런 생각이 분명히 느껴진다.
영문과 재학생이었고 이름은 권은정(權恩淨). 상큼하고 발랄한 감수성을 지닌 은정이는 늘 나와 대화 나누기를 좋아하며 봄꽃이 만발한 거리를 함께 걷기도 했다.
아주 가벼운 연정 같은 것도 전혀 없지는 않았다. 밝고 환한 은정이의 웃음소리가 좋았다. 부친이 교장과 안동교육장을 지낸 분이라 했다.
하지만 종강이 되고 만날 기회가 끊어지면서 은정이와의 만남도 저절로 끊어졌다. 나중에 들으니 경북대 대학원으로 진학했고 졸업 후 서울로 옮겨갔다고 했다.
이따금 안부전화를 몇번 받은 기억도 있다.
은정이 글솜씨는 진작부터 뛰어났고 특히 산문에 능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그녀의 이름이 점점 언론에도 오르고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녀의 발자취를 인터넷에서 확인해보니 고등학교 교사와 대학 강사를 거쳐 대한적십자사에서 여러 해 일하다가 결혼과 더불어 영국으로 건너간 듯하다.
1990년대는 줄곧 ‘한겨레’와 ‘한겨레 21’의 런던 주재 통신원으로 활동했다. 옥스퍼드의 세인트클레어 국제고등학교에서 한국문학 강사로 일하기도 했다. 귀국 후 ‘한겨레 21’에 오래 연재했던 ‘권은정의 휴먼포엠’으로 인터뷰 전문기자가 되었다.
‘한겨레 21’과 ‘참여 사회’ 외에도 ‘샘터 ‘ ‘샘이 깊은 물’ ‘들숨날숨’ ‘보그 콜어’ ‘함께 걸음’ ‘사이버 참여연대’ ‘오마이뉴스’등에 열심히 글을 발표했다. 저서도 여러 권 발간했는데 영국의 교육제도와 교육문화에 관한 “젠틀맨 만들기”, “그 사람이 아름답다”, “착한 기업 이야기”, “아름다운 왕따들”, “시몬느 베이유” 등이 있고, 번역서로는 “그녀가 나를 만나기 전”, “행복육아”, “타인의 아이들”, “시몬느 베이유” 등을 발간했다.
문필가로서 은정의 왕성한 발자취를 확인하게 된다. 재학시절 그녀의 문학강의를 맡았던 나로서는 몹시 흐뭇하고 가슴 뿌듯한 일이다. 자유기고가, 칼럼니스트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나중엔 한명숙 총리 시절에 국무총리비서실 홍보기획 비서관으로 발탁되었고, 이후에도 “권은정의 WHO”, “권은정의 Social Job” 등 다채로운 출판활동을 이어갔다. 최근에는 무슨 일인지 저서 발간소식이 뜸하다. 열심히 살아온 옛 제자의 눈부신 활동에 크나큰 박수와 성원을 보낸다.
선생님,
세월은 흐르고 흘러갑니다.
그러나 영원히 변하지 않는
인간의 그리움.
그것에 의지하여 오늘 또
한 가닥 봄바람에 실어보냅니다.
아름다운 기억들과
그것에서 우러나는 오늘의 이 시간들.
항상 건강하십시오.
1991년 5월 7일
恩 淨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