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전 해군 복무 제자의 편지 보니···”손상현군, 왈칵 그립구나”

이동순 편지

모든 편지는 정겹고 아름답다. 하고 싶은 말이나 안부, 소식, 문안 등 이런 다채로운 것을 전하는 멋진 도구였다. 전체를 한 덩어리로 보면 서두, 본문, 결말 등 크게 3단계로 나누어진다.

여기에도 제각기 개성에 따른 의례가 배치되는데 호칭, 계절인사, 문안, 자기 안부 등이 서두에 들어가는 내용이다. 본문에서는 여러 가지 사연과 특별히 전하고 싶은 말을 소상히 풀어놓는다. 결말에서는 필수적으로 날짜, 이름이 들어간다.

보내는 이의 목적에 따라 편지의 종류는 천 갈래 만 갈래로 나뉜다. 일단 격식과 예의를 갖추어야 하기에 편지쓰기를 두려워하거나 주저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편지 하나로 꽉 막혔던 일이 아주 손쉽게 풀리고 해결되는 경우도 있다.

편지 한 통의 발단으로 결혼이 이루어지거나 안타까운 이별이 다가오는 사례도 있다. 이만큼 편지는 서로를 이어주는 끈끈한 매개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해 왔다.

옛날의 편지는 대개 모필(毛筆)로 써서 그 고전적 분위기의 독특함이 만들어지며
멋진 필체에서 미학과 개성을 느끼기도 한다. 이를 간찰(簡札)이라고 하는데 수집전문가들이 탐을 내는 것들도 많다. 한지에 쓴 국문편지도 아름답다.

근대사회로 넘어오면서 쓰는 도구는 펜, 연필, 만년필, 볼펜 등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담아서 전하는 내용에는 변화가 없었다. 도시로 나가 공부하는 자녀가 고향집 부모님께 용돈을 요청하는 편지는 자못 곡진하고 처연하고 애달프기도 했다.
그래야만 목적을 쉽게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터에서 아내, 부모님께 보내는 편지는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었다. 오죽하면 ‘향기 품은 군사우편'(유춘산)이란 대중가요 노랫말까지 있었을까? 일제말 ‘목단강 편지'(이화자)란 노래도 있었다. 북만주 노동이민으로 떠나간 남편에게 건강과 무탈하기를 기원하는 아내의 편지였다.

‘일자일루(一字一淚)'(백년설)란 노래는 떠나간 님을 생각하며 편지를 쓰는데 한 글자 한 글자를 쓸 때 잉크가 아니라 눈물을 찍어서 쓴다는 가슴 저린 내용이다.
우리 근대사는 이렇게 처절하고도 신산(辛酸)한 시간들이 많았다.

이만큼 편지는 오랜 세월을 우리 민족의 삶과 더불어 공존해온 소중한 도구였다. 그 편지가 이젠 흘러간 시대의 유물이 되었다. 전자매체 시대가 펼쳐진 후로는 문자, 카톡 따위의 전자편지 형식으로 바뀌었는데 종이에 쓴 손편지와는 등급이나 차원이 다르다.

일시성, 통과성, 찰나성, 감각성이 도저히 옛 편지의 품격을 따르지 못한다.

오늘 보여드리는 편지는 군복무 중인 대학 제자가 보내온 편지다. 제자들은 평소 삶의 의욕이 떨어지거나 모든 일에 지치고 나약해졌을 때 연구실로 교수를 불쑥 찾아오게 된다.

나는 그들의 기색을 먼저 살피고 심리적 현황을 파악한 뒤 일단 위로와 격려를 준다. 내 연구실을 다녀간 제자가 학업을 포기할 정도의 실의에 빠졌다가 새로운 용기를 얻어서 현실로 복귀한 경우를 종종 보면서 교수의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편지의 주인공 손상현 군은 얼굴이 해맑고 소년스런 용모를 지녔다. 부친이 불교 진각종의 지도자급 인물로 기억한다. 제자는 자주 내 연구실을 다녀갔는데 마음의 대화를 통해 철석같은 믿음을 지니었다. 그가 해군에 지원입대해서 편지를 보내왔다.

평소 대화에서 다 하지 못한 말을 편지에서 길고 따뜻함이 느껴지는 문장으로 자신의 가슴을 전하고 있다. 손상현 군은 이후 제대, 복학, 졸업을 잘 마무리했다. 학과 후배와 결혼했는데 그 주례도 내가 보았다. 졸업 후 진각종에서 운영하는 고등학교의 국어교사로 활동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필시 아버지가 살아간 삶의 경로를 그대로 밟아갔을 것이다. 제자는 지금쯤 진각종 청년지도자가 되었으리라. 모처럼 제자의 편지를 읽노라니 그의 얼굴과 잔잔한 목소리가 왈칵 그리워진다.

손군! 언제 어디서나 예전 청년기의 굳센 심기를 잘 유지하며 의롭게 살아가시게나.

손상현이란 제자가 이동순 시인에게 해군 복무 중 보낸 편지. 군함과 R.O.K NAVY가 선명하다. 

사실, 얼마 전 학교 때 친구로부터
선생님의 요즘 근황을 전해 들었더랬습니다.
시집을 새로 한 권 내셨다면서요.
꼼꼼하지 못하고 덤벙대는 그 친구의 배려 덕분으로
시집 제목조차도 모르고 있지만
다음에 밖에 나갈 기회가 있으면
꼭 한 번 서점에 들러보리라 다짐합니다.

그간의 고되었던 작업과정이야
제가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만
그간의 고된 노동의 성과물일
선생님 시집의 첫 세상 나들이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참, 저는 해군에 지원입대했더랬습니다.
편지지 중앙에 있는 그림 속의 배 같은
그런 전투함을 타고 거친 바다를 누비는
진짜 해군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그마한 섬에서
경계근무를 서며 해군 흉내는 조금 내며
그렇게 지내고 있습니다.

늘 바다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게 그래도 무척이나
다행이라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언젠가 저와 영민이가 군대에 가게 되었다고 찾아뵈었을 때
선생님이 들려주셨던 군대 얘기가 생각납니다.
그 폭력적이고 물리적인 힘들 속에서
억눌려지고 길들여지는 개성들,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
스스로가 관계했던 그 모든 소중했던 것들과의 헤어짐과 단절,
그 속에서 느껴지는 소외감, 허탈, 무력감들,
점점 단순해지고 길들여지는 스스로를
문득 발견할 때의 그 소름끼치는 모멸감들.
선생님께서 얘기하셨던 그 모든 것들이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긴 시간의 흐름에도 근본적으로 하나도 변한 게 없이
지금의 저를 또한 괴롭히는군요.

하지만 고통스러워 하고 방황만 하기에는
너무도 길고 아까운 삼년이기에
작은 것에도 소홀히 하지 않고
스스로를 단련시키는 계기로 삼으려는
가냘픈 극복의 노력도 해봅니다.

나중에 선생님 앞에 서게 되는 그날,
결코 세월에 찌들은 나약하고 비굴한 모습이 아닌
당당하고 성실한 모습 보이려고 노력하겠습니다.
끝으로 제가 학교 다니는 동안
내내 각별히 보살펴주신
선생님 은혜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선생님, 내내 몸 건강하십시오.
선생님의 소박하던 너털웃음이 그립습니다.
학교도 그립구요.
그 각별하던 웃음 잃지 않도록 하십시오.

언제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다음에 또 소식 드릴 때까지 건강십시오.
그럼 이만……

1992년 6월 22일

제자 상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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