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고 궁금하고 미안한 제자 최순옥

제자 최순옥이 스승 이동순 시인에게

대학에서 제자를 길러내는 일을 평생토록 하다가 마무리할 때가 되어 떠났다. 내 나이 스물여덟에 교수가 되어 강단에 서서 얄팍한 지식을 전달하고 지식 외의 인간적 감화를 위해 애쓰기도 하고 선생이라는 본연의 직분을 성찰하며 그렇게 오로지 한길로 평생을 살아왔다.

남을 가르치고 일깨운다는 선생의 일이 참으로 엄숙하고 막중한 사명임에 틀림 없건만 그에 부합되는 삶을 제대로 살았는지 돌이켜 보면 아찔하고 한심하며 현기증마저 일어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한 가지 다행스럽고 복된 일은 타고난 재능이 풍부하게 넘실거리고 이미 부여받은 선근(善根)으로 가득 채워진 그런 품성의 제자가 제 발로 다가와 지도 받기를 청하고 돈독한 사제관계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온전한 나의 복록이 아닐 수 없다.

좋은 제자들이 연못의 비단잉어처럼 와글거린다면 그 얼마나 선생으로서는 행운이 아니리오. 대학원에서 박사를 열여섯이나 배출하고 석사는 70여명 넘게 그 숫자도 헤아리지 못한다. 일단 지도 받는 제자로 문중에 들어와 일정기간 강의를 통해 수업을 받고 무수한 발표와 토론, 논점의 정리 속에서 알게 모르게 학자적 자질은 쑥쑥 자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본인의 줄기찬 독서와 사색, 관점의 배양과 단련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리라. 그런 정련(精練)의 과정을 거친 다음 악전고투 끝에 완성된 논문을 발표하고 마침내 어엿한 학위수여자가 되어 일자리까지 잡아 어딘가로 진출하게 된다면 선생된 자의 기쁨과 보람은 최고조에 달한다. 그 뒷모습을 보고 흐뭇함을 즐기는 것이 선생이란 자리에 선 사람의 무한행복이다.

하지만 이 학위과정을 마치지 못한 경우도 많다. 학비의 부족, 의욕의 고갈, 질병이나 결혼 등 학업을 계속 이어갈 환경이 못 되는 그런 일들 때문에 미완성으로 떠나는 모습은 가슴이 찢어지고 아프고 고통스럽다.

이 편지의 주인공인 최순옥 선생도 그런 제자이다. 석사를 잘 마치고 박사과정에 진학했지만 끝내 학위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기어이 중도에 뜻을 접어야만 했다.
시어머니 병 수발이 큰 이유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부부가 다 같이 대학원 공부를 하다가 어느 날부터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돌이켜 보니 두 사람의 결혼 주례도 내가 보았다. 늘 웃고 매사에 바지런하고 토론도 잘 하던 기대가 크던 제자였는데 생각하면 참 안타깝다. 그리고 미진한 마음에 가슴이 아프다. 부부가 함께 고품격의 문화생활을 즐기고 고전과 골동에도 수집의 취향을 가지며 국내 문화행사엔 자녀를 데리고 그 어디든 달려가던 모범적 부모이기도 했다.

지금은 소식이 끊어졌으나 늘 그립고 궁금하고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들이 학위를 마치지 못한 것이 꼭 내 책임이 아니었던가 자책마저 드는 것이다.

1995년 5월 창작과비평에서 나온 이동순 시집 <봄의 설법>. 아래 최순옥 제자가 스승에게 편지를 쓰기 직전이다. 하지만 제자가 스승의 이 시집 발간을 알고 썼는지는 이 편지로는 확인이 어렵다. 

 

동그마니 앉아있던 작은 새가
날아간 나무 끝 가지에 달린 이파리가
가늘게 떨고 있습니다.
그 예민함에
오랫동안 무뎌 있던 감각의 더듬이가 움찔하였습니다.
평안하신지요?
선생님을 뵌 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지만
여러 시편(詩篇)들을 통해
거친 삶을, 그러나 아름다운 세상을
온몸으로 부둥켜 안고 나갈 수 있는 넉넉함과
가슴 속에서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 열정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삶에 대해 사색하고 행동하며
못내 의식에 기름 끼지 않기를 고민하는
아직은 미숙함 투성이인 저희들을
늘 따스한 눈길로 지켜봐 주십시요.
더불어 내내 건강하시기를 소망합니다.

1995년 5월 16일

비온 뒤의 정갈한 교정에서

최 순 옥 올림

젊은날의 이동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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