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혁재의 대선 길목 D-42] ‘3.9대선’ 공정·객관 보도 안하면 언론도, 사회도 희망 없어

제15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한 후보의 선거벽보.

1998년 지방선거 때 있었던 에피소드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 3개월 만에 치러진 제2회 동시지방선거는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에게 유리하리라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었습니다. 농촌 지역의 할머니 한 분으로부터 국민회의 중앙당으로 전화 한 통이 걸려 왔습니다. 그 할머니가 이렇게 물었다지요. “이번엔 누구를 찍어야 김대중 선생이 되나요?”

무슨 뜻인지 이해를 하지 못한 당직자가 차근차근 물어보니 사연은 이랬답니다. 지난 대통령선거 때 “이인제 찍으면 김대중이 된다”고 해서 이인제를 찍었더니 정말로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번 선거에서는 누구를 찍어야 김대중이 되는지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아 답답해서 전화를 했다”는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이인제를 찍으면 김대중이 된다.” 제15대 대선 막바지에 돌아다닌 입소문입니다. 지지율이 50%를 넘나들던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는 아들들의 병역비리 의혹이 불거져 고전하고 있었습니다. 지지율이 10%대로 떨어졌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의혹 자체보다는 “죄송하다”고 몸을 낮추지 않고 “합법적인데 뭐가 문제”냐는 반응에 민심이 돌아선 겁니다.

한나라당 경선에서 이회창 후보에게 졌던 이인제 후보가 후보 교체를 요구했습니다. 이회창 후보에게서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없는 치명적인 결함이 발견되었으므로 본인이 사퇴하거나 당에서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연히 이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인제 후보는 탈당해 국민신당을 만들어 독자출마했습니다.

이인제 후보는 김대중 후보와 엎치락뒤치락하고, 이회창 후보는 3위로 뒤쳐졌습니다. 이인제 후보가 이회창 후보에게 10% 이상 앞서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인제를 찍으면 김대중이 된다”는 입소문이 돌면서 이인제 후보 지지가 떨어지기 시작해 공식선거운동이 시작될 즈음에는 이회창 후보에게 10% 가량 뒤지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인제 후보는 득표율 19.2%(493만표)로 3위에 그쳤고, 김대중 후보는 이회창 후보를 사상최소득표율차(1.53% 39만표)로 꺾었습니다. 선거결과에 대한 평가는 엇갈립니다. 이인제 독자출마로 보수가 분열되는 바람에 김 후보가 당선됐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이인제 후보가 제3후보로 보수뿐 만아니라 민주진보진영의 지지도 받았다는 반론도 있습니다.


비슷한 일이 1992년 제14대 대선에서도 있었습니다. “정주영을 찍으면 김대중이 된다”는 입소문, 아니 입소문이 아니라 언론의 노골적인 선거 개입이었습니다. 조선일보 류근일 논설실장이 ‘정주영 변수’라는 칼럼에서 ‘정주영을 찍으면 김대중이 당선된다“고 한 겁니다. 정주영 후보를 찍지 말고 김영삼 후보를 찍으라고 대놓고 부추긴 셈입니다.

“이인제를 찍으면 김대중이 된다”는 입소문은 “정주영을 찍으면 김대중이 당선된다”는 류근일 실장의 주장을 차용한 것입니다. 참고로 류근일 논설실장은 IMF 구제금융을 받게 되자 “대통령 하나 잘못 뽑아서 IMF가 왔다”는 칼럼을 쓰기도 했습니다. 5년 전에 대통령을 잘못 뽑도록 선동한 데 대한 자기반성은 당연히 없었습니다.

편파적이면서도 중립적인 체하는 족벌보수언론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선거에 개입한 것은 강력한 제3후보의 존재 때문이었습니다. 제3후보는 여당과 제1야당 후보의 대결 구도를 흔드는 강력한 후보를 말합니다. 제3후보가 보수·중도 성향으로 보수 표를 갈라먹어 진보후보가 당선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족벌보수언론이 부당한 선거개입을 했던 겁니다.

이번 대선에도 강력한 제3후보가 있습니다. 안철수 후보입니다. 지금은 3위지만 비호감도도 높고 후보교체론에 시달리는 윤석열 후보가 계속 실책을 하면 2위로 치고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후보단일화에 실패하고 제3후보가 적당한 지지를 유지한다면 이번에는 “안철수(또는 윤석열)을 찍으면 이재명이 된다”는 입소문이 나올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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