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테러 한인희생⑧리처드 이] 두달 전 ‘내집 꿈’ 이룬 두돌 배기 아빠

9.11 희생한인 리처드 이


2001년 9월 11일 테러로 30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들 무고한 희생자 중에는 한인 21명도 있었다. 두개 동의 세계무역센터 건물이 있던 자리에 조성된 추모의 연못 ‘노스풀과 사우스풀에는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 2983명의 이름이 있다. 9.11테러 현장인 로어 맨하탄 그라운드 제로에 세워진 9.11추모박물관에는 한인 희생자 21명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한인 희생자들은 노스 풀에 경희 케이시 조, 파멜라 추, 프레드릭 한, 강준구, 앤드류 재훈김, 로렌스 돈 김, 구본석, 린다 이, 리처드 이, 스튜어트 수진 이, 박계형, 크리스티나 성아 육, 대니얼 송씨 등 모두 13명이, 사우스 풀에는 대니얼 이, 이동철, 수 김 핸슨, 이명우, 이현준, 진선 박 웰스, 데이빗 이, 아놀드 임씨 등 8명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아시아엔>은 이들의 사연을 독자들께 전한다. 먼저 언론에 알려진 한인 희생자 이름을 인터넷에서 찾아내고, 추모박물관 데이터베이스에서 이름을 검색해 사진과 이야기를 직접 카메라로 찍어서 기사에 첨부했다. 또 인터넷 등에 있는 희생자 가족이나 지인들 인터뷰 등을 찾아 기사에 붙였다. <편집자>

리처드 Y. C. 리 (1967년 7월 4일 ~ 2001년 9월 11일), 향년 34세

[아시아엔=김동연 <아시아엔> 미주 통신원] 워싱턴 DC에서 태어나 하와이에서 자란 한국계 미국인. 리처드씨는 9살 연하인 아내 캐런(Karen)과 생후 22개월 된 아들과 함께 롱아일랜드주 그레잇넥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일을 마치고 귀가해선 어린 아들을 위해 자장가를 불러주곤 했다. 책장과 장난감 상자를 직접 만들어주기도 했다.

리처드씨는 캔터 피츠제럴드(Cantor Fitzgerald) 보험중개회사에서 전자거래 서비스 이스피드(eSpeed) 담당의 정보통신 최고책임자로 일하고 있었다. 그 날, 리처드씨는 북쪽 타워(1번 빌딩) 104층 회사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다음은 캔터 피츠제럴드 추모 웹사이트에서 그를 기억하는 사원들이 올린 추모글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하루 14시간 일할 정도로 항상 열심이었던 리처드씨는 불가능해 보였던 일을 항상 해결해준 고마운 임원이었다. 같이 일하던 동료들을 항상 챙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부서에 있던 모든 직원들이 다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항상 자신이 원하던 모습의 멘토이자 최고책임자가 되도록 고군분투했고, 힘든 업무환경을 즐겁게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리처드씨의 성실함과 유머, 열정과 긍정적인 마인드는 다른 이들에게 큰 동기부여가 되었다. 그는 임원들과 동료 직원으로부터 많은 신뢰와 사랑을 받았다.

캔터 피츠제럴드 영국지사에서 리처드씨와 함께 일했던 동료 마이크 웨스트레이크씨는 “리처드는 사소한 것까지 절대 놓치지 않는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문제의 전 과정과 결과에 대해 꼼꼼하게 기록하고 스스로의 방법으로 해결하곤 했다”고 기억했다.

리처드씨는 뛰어난 직원일 뿐만 아니라 헌신적인 가장이자 좋은 친구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하루에 10번 정도나 집에 전화를 걸거나 이메일을 보내 가족의 안부를 챙겼으며, 매일 아침마다 재밌는 유머가 담긴 안부메일을 보내주기도 했다. 1번 빌딩 104층에 위치한 그의 사무실 벽에는 아들과 아내 사진 수백장이 걸려 있었다. 저녁에 귀가하면 아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목욕을 시켜주었다. 여가시간에는 아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담은 비디오를 만들어서 CD에 저장하고 동료들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9.11 테러 두달 전, 리처드씨 부부는 그토록 원하던 내집 장만의 꿈을 이루었다. 리처드씨는 그곳에서 아이를 키우고 아내와 함께 평생을 함께하며 살 것을 약속했다. 리처드씨가 수공업에 몰두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아들의 놀이방에 들어갈 장난감 상자와 책장을 열심히 만들기도 했다.

9월 11일에도 자택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 런던 지사와 통화했던 리처드씨는 평소와 같이 오전 6시 사무실에 도착했다. 여객기가 빌딩과 충돌한 직후 그는 아내에게 전화해서 자신은 안전하다는 말을 전한 뒤 동료들과 함께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도록 구조인력에게 휴대폰 전화번호를 남겨주고 통화를 마쳤다. 하지만 경찰이 5분 뒤에 그의 휴대폰 번호로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리처드씨를 아는 사람들은 마음에서 지우지 못할 큰 상처를 입었지만, 마지막까지 헌신했던 그의 정신은 오래토록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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