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철의 미술산책⑪] 시리아 헬레니즘의 여왕 ‘제노비아’

마지막으로 팔미라를 굽어보는 제노비아(Zenobia’s last look on Palmyra), Herbert G. Schmalz, 1888, 183 cm x 153 cm, Art Gallery of South Australia

[아시아엔=김인철 미술평론가, 충북대 대학원 강사] 귀족 여인 셉티마 제노비아(Septima Zenobia)는 AD 240년경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던 시리아의 팔미라(Palmyra)에서 태어났다. 제노비아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그중에서 그녀의 아버지가 율리우스 아우렐리우스 제노비우스(Julius Aurelius Zenobius)였다는 이야기만 조금 신빙성이 있을 정도다.

그녀는 스스로 클레오파트라(Cleopatra)의 후손으로 내세우면서 사냥을 즐겼고 이집트어, 그리스어는 물론 라틴어에도 능숙했다. 14세가 되었을 무렵 지역의 군주였던 오다에나투스(Odaenathus)의 후처가 되었고, 263년에는 남편이 로마 동방의 절대권력자로 추대되면서 왕비가 되었다. 당시 남편은 로마제국의 승인을 받아 흑해 연안으로부터 팔레스타인에 이르는 영역을 합법적으로 다스렸다.

267년 그녀가 20대 후반 또는 30대 초반이 되었을 때 왕의 큰아들이 전투에서 귀환하는 도중 암살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하여 그가 낳은 10살 먹은 아들 바발라투스(Vaballathus)가 왕위 계승자가 되었지만, 아들은 어머니의 영향 때문인지 어떠한 힘도 발휘하지 못하였다. 그런 가운데 제노비아는 여러 언어와 민족이 뒤섞인 그 지역을 잘 다스려 나갔다. 제각각이던 지역문화를 이해하면서 어떤 충돌이나 갈등을 일으키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으며 각기 인종적·정치적 차이가 있는 문화를 서로 존중하게끔 하면서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제노비아는 시리아(Syria)의 실질적 군주였으면서 헬레니즘문화의 여왕으로 대외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궁궐을 배움의 중심지로 만들어 재위 기간 학자들과 함께 많은 지적(知的) 결과물을 남겼다. 학자들이 팔미라로 이주해 오면서 그곳은 시리아의 아테네와 같은 곳이 되었고, 그녀의 왕국은 나날이 발전했다.

그러나 모든 일이 잘 진행되면서 그녀는 욕심을 부리게 되고, 결국 그런 이유로 몰락을 자초하게 된다. 그것은 아주 사소한 일로 시작되었다. 바로 로마황제만이 가능했던 일로, 272년 4월 제노비아 왕국의 동전(coin)을 주조했던 것이다. 이는 로마의 신경을 크게 건드려, 결국 로마로부터 큰 제재를 받게 된다. 동전에는 제노비아와 아들이 새겨졌고 ‘존엄한’(augusta, augustus)이라는 銘文(명문)이 새겨졌는데 이는 오로지 로마황제만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이었다.

이어진 로마군의 침공에 팔미라는 변변히 방어도 할 수 없었고, 제노비아는 바로 도망 쳐야 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그녀는 생포되어 로마로 압송되었다. 그리하여 274년 죽게 되는데, 관련하여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그 중에는 원형극장에 웃음거리로 3일 동안 조리돌림 당한 후 참수되었다는 것과 로마로 오는 도중 죽었다는 말 등이 포함돼 있다. 또 어떤 이는 그녀를 생포한 로마 병사와 가정을 꾸려 자식들을 낳고 로마제국 어딘가에서 행복하게 살았다고도 얘기한다.

제노비아와 관련하여 동유럽 일부와 중근동 지역에서는 극적인 대상으로 여겨 적지 않은 예술작품이 남아있다. 게다가 중동지역, 특히 시리아에서는 지금도 그녀 자체가 바로 애국을 상징할 정도로 대단한 존경의 대상이다.

한편 그녀의 용모에 대하여 남겨진 기록을 살펴보면, 얼굴색은 거무스름했고, 눈 역시 검은색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권위적인 면모의 당당함을 나타낸 미녀였다고 한다. 그런 기록을 근거로 그림들을 살펴보면, 맞지 않는 외모로 이루어진 것들이 대부분이다.

관련 그림들 대부분 르네상스 시기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바로 피렌체와 로마 중심이다. 그리하여 미켈란젤로가 남긴 스케치와, 미켈레 디 리돌포(Michele di Ridolfo)가 그린 그녀의 그림이 나름 유명하다. 그러나 그림 속에서는 지나치게 요염하게 표현되어 역사를 무시한 작가의 무지탓이라는 비난이 거세다.

그림 속의 제노비아를 자세히 보면, 금으로 된 쇠사슬에 묶인 그녀의 꽉 쥔 두 주먹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 아마도 서양 회화에서 제대로 주먹을 쥔 유일한 여성이 아닐까 싶다. 또 얼핏 보면 여성이 아닌 듯한 얼굴 표정이다. 하지만 그 속에 어떤 결연한 모습과 함께 분노와 아쉬움이 체념으로 바뀌는 상태가 엿보인다. 그런 모습은 국가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다가 어처구니 없는 일로 잘못된 것에 대한 책임과 그에 따른 회한이다.

그녀는 클레오파트라에 버금가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일로 인하여 특히 중동을 비롯하여 인접 국가의 예술가들에게 적지 않은 영감을 주었다. 제노비아와 관련된 전설은 여러 작가와 역사학자들에 의해 수용되면서 재해석 가능한 그들 지역의 우상이 탄생됐다.

따라서 제노비아는 억압받는 사람들의 영웅, 자유의 투사, 그리고 수많은 여성의 롤모델이 되었던 여왕으로도 그려졌다. 특히 러시아 여제 예카테리나 2세는 그녀를 두고 ‘군사력과 지적인 능력을 갖추었던 여자’로 자신과 비유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1930년대 이집트의 한 신문사가 제노비아를 높이 평가하면서 그녀는 범아랍민족주의를 지칭하는 강력한 여성 지도자로 부각되기도 했다. 오늘날 시리아에서는 제노비아를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이자, 그들이 지닌 애국심의 상징, 그리로 폭정에 맞서 싸운 지배자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특히 서양에서 교육 받은 시리아 지식인들이 제노비아를 소재로 문학작품을 다수 발표했다. 이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서 팔레스타인 입장을 지지하고 있는 시리아의 관점으로 팔레스타인의 자결권을 위한 투쟁의 상징으로 그녀를 그리고 있다.

그림의 작자인 허버트 쉬말츠(Herbert G. Schmalz, 1856~1935)는 영국에서 독일인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사우스켄싱턴미술학교(South Kensington Art School)에서 수업을 시작한 후 왕립미술학교(Royal Academy of Arts)로 옮겨 프랑크 딕시(Frank Dicksee), 스탄호프 폽스(Stanhope Forbes), 아서 해커(Arthur Hacker)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마지막 수업은 앤트워프(Antwerp)의 왕립미술학교(Royal Academy of Fine Arts)에서였다.

그는 런던으로 돌아온 이후, 역사화에 전념하면서 왕립미술전에는 뒤늦게 전시했고, 이어 1890년 예루살렘에 다녀온 후에는 신약성경을 주제로 한 ‘갈보리로부터의 귀환’(Return from Calvary, 1891) 등의 명작을 남겼다. 1895년이 지나면서 초상화에 집중하면서 1900년에는 대규모 개인전을 열었는데, 이는 본드거리(Bond Street)의 미술협회(Fine Art Society)에서 주관했으며 주제는 ‘멋진 여인들의 꿈’(A Dream of Fair Women)이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한 이후, 허버트 쉬말츠는 자신의 이름을 완전히 영국식인 허버트 구스타브 카마이클(Herbert Gustave Carmichael)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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