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철의 미술산책⑩] 독일 청기사 ‘선봉’ 아우구스트 마케작 ‘네 소녀’
[아시아엔=김인철 미술평론가, 충북대 대학원 강사] 20세기 초의 주요 현대 미술 운동 중 다다이즘(Dadaism)의 시작은 글자 그대로 ‘무의미(無意味)’였다. 그랬던 까닭이 바로 인류사에서 처음 이루어진 대규모 전쟁 때문이었는데 그것이 바로 1차세계대전이었다.
전쟁 전 프랑스 파리는 전세계에서 미술을 비롯한 선진 예술을 공부하고자 모여든 수많은 젊은이로 붐볐다. 국적은 달랐지만, 당시 야외의 카페에는 카페오레(caf? au lait)를 함께 마시면서 예술과 철학을 논쟁하던 젊은이들로 가득했다.
그러다가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는데 바로 전쟁 때문이었다. 젊은이들 각자 자신의 고국으로 돌아가 고국을 위한 전선(戰線)에 투입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살아남은 젊은이들이 다시 파리에 모였지만, 친하게 지냈던 동료들이 보이지 않자 크게 좌절하고 만다.
그러자 그들은 다시 생각했다. 삶이란 무엇이며, 이런 일이 벌어졌는데 과연 예술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무슨 의지와 의미, 목적으로 예술작업을 이어갈 수 있을까? 그렇게 ‘다다’는 시작되었다.
독일의 표현주의 화가 중 선구적 위치에 있던 아우구스트 마케(August Robert Ludwig Macke, 1887~1914) 역시 전쟁이 발발하자 징집되어 결국 프랑스와 대치했던 샹파뉴(Champagne) 전선에 투입되어 전사한다. 1914년 9월 26일이었다.
그때 죽은 독일 출신 동료 화가들로 오토 솔타우(Otto Soltau)를 비롯하여, 함께 청기사 그룹을 대표하던 프란츠 마르크(Franz Marc)라는 대단한 작가도 있었다.
마케는 독일 표현주의 화파인 청기사(靑騎士, Der Blaue Reiter, The Blue Rider)를 대표하면서 유럽에서 이루어지던 전위예술(avant-garde)이 독일로 들어와 성공적으로 자리잡게끔 독일 표현주의를 만들어가는 과정의 중심에 있던 작가였다. 그런 진행을 통하여 진실한 표현이 과연 무엇인지 자신의 회화 속에 여러 요소를 통합하여 제시했다.
베스트팔리아(Westphalia)의 메셰데(Meschede)에서 출생했지만 주로 본(Bonn)에서 활약한 마케는 1907년 처음으로 파리에 와서 당시 유행하던 인상주의에 감동한 후 다시 베를린으로 가서 로비스 코린트(Lovis Corinth)의 화실에서 실력을 가다듬었다. 그리하여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및 포비즘(Fauvism)을 순서대로 경험하면서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갔다.
전쟁 전이었던 1910년 친구 프란츠 마르크를 통하여 러시아 출신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를 만나 비구상적 미학과 신비적이며 상징적 주제를 내세운 ‘청기사파’를 만들기 시작했다.
마케는 1912년 파리에서 로베르 들로니(Robert Delaunay)를 만나 그로부터 색채적 큐비즘(chromatic Cubism)의 세계를 알게 되었고, 아울러 아폴리네르(Apollinaire)의 오르피즘(Orphism)을 받아들이면서 앞으로 전개할 자신의 미술 세계를 위한 지침으로 삼았다.
이어 1914년 폴 클레(Paul Klee), 루이 무아이에(Louis Moilliet)와 함께 아프리카의 튀니지(Tunisia)를 여행하면서 그의 마지막 미술 세계였던 빛의 화가(luminist)로의 접근을 이루어갔다.
그리하여 주로 색과 형태를 왜곡하면서 객관적 현실을 재현하기보다는 감정과 심상(心象)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주었던 그는 1905년부터 1925년까지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표현주의 화가이자, 포비스트(野獸主義者, Fauvist)로 불린 전형적인 작가가 되었다.
공교롭게도 그의 마지막 그림인 ‘이별(Farewell)’은 마치 전쟁 발발에 따른 우울한 분위기를 묘사한 것 같았으며, 또한 그가 뮌헨에서 그렸던 유명한 그림 ‘터키 카페’(T?rkisches Caf?) 역시 그가 죽던 해(1914)의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