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철의 미술산책⑦] 모네 ‘야생화 들판에서’···32살 요절한 부인 카미유 모델
초기 인상주의(impressionism)의 전개 과정과 그때의 그림들을 찾다 보면 모네(Monet, 1840~1926), 르누아르(Renoir), 마네(Manet) 등이 모네의 부인 카미유(Camille Doncieux, 1847~1879)를 모델로 한, 그리고 아르장퇴유(Argenteuil)와 같은 시골 마을을 묘사한 매우 중요한 ‘외광파(外光派) 스타일’(pleinairisme)의 작품들을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 인상파의 유명한 세 번째 전시회(처음으로 인상주의라고 그들 스스로 칭하기 시작한 1877년의 전시회)에 발표된 모네의 작품 ‘야생화 들판에서’(In the Meadow, Dans la prairie)는 큰 의미를 지닌다.
당시의 전시회는 인상파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널리 알려진 미술품 수집가이자 미술사가였던 테오도르 뒤레(Th?odore Duret)가 공간을 임대하여 작가들에게 제공하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뒤레는 모네 그림으로 이루어진 ‘인상주의’라는, 당시에는 생소했던 용어를 처음 내세우며 공공연히 이를 표기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시초는 미약했지만 그들의 전시는 이후 미술 전반에 걸쳐 큰 역할을 담당했던 그들의 미술 유파와 함께 모네의 탐구적이면서 중요한 작품이 알려지기 시작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작품 ‘야생화 들판에서’는 모네가 아르장퇴유 체류를 끝낼 무렵의 작품으로, 그는 1871년 말 그곳에 도착하여 이듬해 1월 2일 집들이 파티를 열면서 자신에게 ‘외광파’로의 길을 열어주었던 오랜 스승 외젠 부댕(Eug?ne Boudin)을 초대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곳 아르장퇴유는 이후 50년 동안 인상주의를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요람 중 하나로 알려졌다. 이때 마네(Edouard Manet)는 강 건너 제네빌리에(Gennevilliers)에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던 모네와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 1841~1919)는 각자 서로 다른 이젤을 펼치며 유사한 장면들을 함께 그리곤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나란히 하면서 서로의 작품을 보고 격려하며 작업한 결과, 인상주의가 진정으로 발전했다고 볼 수 있고 그 결과는 두 사람이 속속 내놓은 걸작들로 확인이 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두 작가의 수많은 작품이 현재 전 세계 미술관의 벽을 멋지게 장식하고 있는 것이다.
모네가 그곳으로 이사할 무렵 아르장퇴유는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당시 수도 파리의 규모가 산업화로 인하여 빠르게 확대되면서 사람들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많은 파리의 중산층들이 최소한 당일 또는 주말여행을 위하여 파리 근교의 지역을 찾기 시작했다. 아르장퇴유는 생-라자르역(Gare Saint-Lazare)에서 기차로 25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모네는 부지발(Bougival)과 그의 고향인 르아브르(Le Havre)를 종종 오갔기 때문에 그 지역을 잘 알고 있었다.
그곳은 파리 사람들에게 신선한 공기와 정원 같은 녹지공간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는데, 거기서 만들어진 모네의 초기작품은 종종 파리 사람들이 기대하는 현대적 전원생활에 대한 매혹을 충족시켜주기에 충분했다.
이때 흥미롭게도, 모네는 다양한 주제 선택과 보다 자유로운 소재 실험을 위하여 다시 파리로 눈을 돌려 생라자르 역의 기차 연기와 소음으로 가득 찬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이후 베테위(V?theuil)로 옮겨 머물면서 다시 서정적이고 자연을 소재로 되돌아갔고, 지베르니(Giverny)에 만들었던 자신이 꾸민 정원 화단에는 지금 보고 있는 작품에서처럼 여러 색상의 농도를 지닌 화초 풍경과 더불어 인공 연못 등을 선보일 수 있었다.
즉 모네는 아르장퇴유를 떠난 지 7년 조금 지나 지베르니에 정착하였고 그곳에서 그의 인생 만년을 풍부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정원 원예 프로그램을 시작했던 것이다.
작품 주제는 야생화와 들판이며, 모델인 카미유 모네는 관조적인 자세로 초원의 풀 속에 누워 책을 읽고 있다. 풀밭에서는 여러 색상의 꽃이 마치 톡톡 터지듯 이리저리 머리를 내밀고 있으며 세 편 정도 모네가 제작한 ‘양귀비 들판에서’(Les coquelicots)처럼 약간 붉은 반점들 역시 어떤 반영처럼 이루어지고 있다.
그 몇해 전 모네는 의도적으로 시대를 넘어서는 관점을 실험하면서 심지어 낭만적인 주제를 추구했고 이어 현대 생활에서의 요소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뮤즈(muse)이며 10년 연인이자 6년 어린 아내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이 작품은 10년 전에 살롱에서 찬사를 받은 그의 첫번째 성공적인 작품(카미유를 모델로 했던)의 재현이었다.
1879년 9월 5일, 즉 바로 전날 모네의 부인 카미유(Camille Doncieux)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녀의 나이 불과 32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