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철의 회화속 여성탐구⑦] 로마시대 가정폭력 희생자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
베아트리체 첸치(Beatrice Cenci, 1577~1599)는 로마의 대단한 귀족 프란체스코 첸치 백작(Count Francesco Cenci)의 딸이었다.
첸치 백작 가족은 로마의 유대인 주거지 끝 폐허 위에 새롭게 건축한 중세풍의 첸치궁에서 살았으며 그들은 베아트리체, 오빠 자코모와 프란체스코의 두 번째 아내 루크레치아 페트로니 그리고 그녀의 어린 아들 베르나르도였다.
그런데 그녀의 아버지 프란체스코는 몇 차례 교황에게 소환되어 처벌받았을 정도로 폭력적이고 부도덕한 인물이었다. 아내와 아들들을 학대했으며 딸인 베아트리체 역시 성적으로 유린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일련의 여러 죄목으로 구속되었으나 백작이라는 이유로 풀려났는데, 딸 베아트리체는 아버지의 상습적인 가정 폭력을 참지 못하고 결국 당국에 신고해야만 했다. 하지만 당시 막강한 힘이 있던 로마 귀족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제재를 가할 로마인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그때 그녀의 아버지는 자신을 고해바쳤다는 이유로 베아트리체를 지방에 있는 자신의 성에 가두어버렸다.
그럼에도 베아트리체는 지속되는 가족에 대한 학대를 멈추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아버지를 죽여야만 한다고 마음먹으면서 가족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치밀한 계획을 세워 독약을 준비했고, 그것을 먹였지만 실패하고 만다. 그렇지만 그후 계모와 가족은 다시 힘을 합쳐 프란체스코를 망치로 내려쳐 죽게 한 후 높은 계단 난간에서 떨어뜨려 실족사로 위장했다.
결국 베아트리체의 아버지가 죽은 사건에 대하여 교황과 사법 당국은 면밀히 조사하면서 베아트리체를 범인으로 지목했고 그녀에게 모진 고문을 가했다. 그러는 가운데 살해 사건에 가담했던 가족의 친구가 전해 들은 사건의 전모가 알려지면서 나머지 가족 역시 체포되어 재판받았다.
그렇게 사건 조사가 이루어질 때 로마 사람들 거의 베아트리체를 매우 동정했으나 교황 클레멘스 8세는 추호의 자비심도 없이 1599년 9월 11일 새벽녘에 산탄젤로 다리(Ponte Sant’Angelo)로 끌어내 그들 모두를 처형하고 말았다.
베아트리체의 시신은 산 피에트로 인 몬토리오(San Pietro in Montorio) 성당에 매장되었고 이 일로 로마 사람들은 베아트리체를 오만한 귀족 계급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삼기 시작했는데 해마다 베아트리체가 죽기 전날 밤이 되면 잘린 머리를 든 그녀의 유령이 산탄젤로 다리에 나타난다는 괴담이 생겨났다.
보고 있는 작품은 귀도 레니(Guido Reni 1575~1642)가 남긴 작품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큰 찬사를 받고 있다.
베아트리체 첸치가 사형당한 일은 레니가 로마에 있을 때였다. 레니는 그녀를 직접 보고 그린 것은 아니었음에도 작품은 다른 거장들의 작품과 같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그것은 섬세한 선묘, 점 등을 비교적 밝고 활기차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작품 등으로 레니는 소위 볼로냐 화파(Bolognese school)의 전형을 제시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럼에도 17세기 페미니스트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내세우면서 엘리사베타 시라니(Elisabetta Sirani)의 작품이라고 주장했을 정도로 작품은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첸치는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로마의 무녀(Roman Sybil) 또는 온통 흰색의 장례복 차림으로 마치 성모 마리아와 같은 면모를 보인다. 그러면서 우울한 표정으로 몸을 뒤로 돌려 비스듬한 자세로 사람들과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데 레니는 작품을 주문했던 아스카니오 콜론나(Ascanio Colonna) 추기경을 위하여 전통적 방식을 사용했다.
그후 작품은 스탕달(Stendhal), 퍼시 셸리(Percy Shelley), 뒤마(Dumas) 등을 포함 적지 않은 낭만주의 문인들에게도 영감을 주었다.
비공식적으로 남은 문서 또는 구전에 의하면 레니는 그녀가 처형되기 전날 감옥에 들어가 그녀를 만났거나 아니면 처형장으로 가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떤 이는 그때 레니가 로마에 없었다는 주장도 하는데 그가 그녀에 대하여 비교적 잘 알고 있었던 것만큼은 모두 인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