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철의 회화속 여성탐구④] 세기말 밴더빌트가 출신으로 대부호 부인 된 ‘위트니’ 초상
그림 속 모델이 누구인지 궁금하지만, 그보다는 저런 옷차림의 배경을 이해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1890년대부터 1910년대 미국과 유럽에서 유행했던 장식미술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는 아르누보(Art Nouveau, New Art)를 먼저 알아봐야 한다.
당시 프랑스 중심의 이른바 ‘좋은 시절(Belle Epoch)’이 이루어지면서 풍요로운 세상이 열렸고 그 결과 중동과 북아프리카, 동아시아풍의 장식적 미술이 유입되면서 제법 큰 유행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 기간은 비교적 짧았고 순식간에 종료되었는데, 그 까닭은 1차세계대전이 발발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모델이 입고 있는 카디건, 셔츠 및 바지는 당시 여성들에게는 정말 파격적 복장이랄 수 있다. 옷소매와 카디건 옷깃의 장식 및 의상은 물론 색상 역시 무척 독특하면서 대담하기 그지없는, 지금의 기준으로 보아도 파격적인 스타일이다. 전형적인 아르누보이자, 세기말적 데카당스(D?cadence)의 명백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 속 모델 거트루드 밴더빌트 위트니(Gertrude Vanderbilt Whitney, 1875~1942)는 조각가이자 미술애호가, 후원자로 뉴욕의 위트니미술관(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의 설립자이다. 부호 가문인 밴더빌트가 출신으로 역시 부유했던 위트니 집안의 아들과 결혼했다.
그녀는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Greenwich Village)에 스튜디오를 열어서 당시 미국에서 시작되던 신미술(New American Art)를 지원하고 있었다. 아울러 적극적인 자세로 여성들의 미술 참여를 독려할 정도로 사회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1917년 미국독립미술가협회(Society of Independent Artists) 발족에 경제적 지원을 했으며 새로운 작가 집단이던 애시캔파(Ashcan School)의 작품들을 서슴없이 구입했다. 그리하여 애시캔파의 리더격이었던 로버트 헨리(Robert Henri, 1865~1929)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의뢰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완성된 작품을 본 그녀 남편(Harry Payne Whitney)의 기분은 결코 좋지 못했다. 여인의 옷차림과 포즈 때문이었는데 1910년대 여성의 바지 차림은 절대로 환영받지 못했고 그런 차림으로 소파에 길게 다리를 뻗은, 거의 반쯤 누운 자세는 프랑스 고전파 회화에서 보이던 매춘부에 대한 은유와 다름이 없었다.
좋은 집안에서 교양있는 교육을 받은 그녀가 마치 품행에 문제가 있는 듯한 모습을 나타내는 것 같다는 생각에, 매우 호화롭던 뉴욕 맨허튼 5번가 저택에 결코 부인의 초상화를 걸어둘 수 없다는 결정을 하면서 남편은 창고에 작품을 쳐박아두고 말았다. 결국 그림은 1931년 그녀의 소유였던 웨스트 8번가(West 8th Street)의 스튜디오가 위트니미술관으로 변경되면서 비로소 그곳에 걸릴 수 있었다.
작가 로버트 헨리는 그림을 제작할 당시 뉴욕의 미술학교 아트 스튜던츠 리그(Art Students League of New York)의 교사였다. 그리고 도시를 중심으로 사실적 그림을 그려나가던 애시캔파의 리더이자 여성 작가들을 이끌던 매우 인기있던 화가였다. 헨리는 오하이오 신시내티 출신으로, 펜실배니아 미술학교(Pennsylvania Academy of the Fine Arts)에서 공부한 후 프랑스 파리의 아카데미 줄리엉(Acad?mie Julian)에서 고전주의 거장 윌리엄-아돌프 부게로(William-Adolphe Bouguereau)에게 교육을 받았지만, 나중에 인상주의에 큰 영향을 받고 미국으로 돌아와 자국의 아카데미식 교육에 반대하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작가였다. 그는 유명한 여성 인상파 화가 매리 캐섯(Mary Cassatt)과 먼 친척 사이였다.
로버트 헨리는 미국으로 돌아와 자국 현대 미술의 방향을 제시하고 구축하고자 크게 노력했던 중요한 화가 중 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