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철의 회화속 여성⑪] 모로코 탕헤르의 여인

탕헤르의 여인(A Tangerian Beauty), 조셉 타피로 이바로 작, 1891년경

모로코의 탕헤르(Tangier)는 스페인 남부 지브롤터와 대각선 방향의 해협 반대편에 있는 꽤 큰 도시로, 고대 페니키아 시기에 조성된 전략적 요충지이면서 유럽으로 가는 관문에 위치하여 번영을 이룬 곳이다.

즉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등의 각축장이 되었지만 17세기 모로코가 차지한 이후 다시 그곳이 스페인과 프랑스에 분할 통치되었고 이어 다수의 유럽인이 이주하여 국제적인 도시가 되었다. 지금은 모로코의 주요 산업도시 중 하나가 되어 최대 교역의 중심지이다. 그곳의 문화는 고대로부터 따지면 당연히 국제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지중해와 북아프리카 특유의 기후에 따른 면모와 함께 이슬람과 관련이 크다.

1871년 화가는 처음으로 탕헤르에 가서 모로코의 이국적인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관련하여 현지인들의 모습과 풍광을 여럿 남겼는데 그런 작업은 그가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1913년 그곳에서 생을 마친 작가는 수채화에 특히 정통했기 때문에 그가 그렇게 그린 모로코의 남녀 초상들은 생생한 그림자는 물론이고 풍부한 그곳 특유의 장식과 패턴 등을 제대로 묘사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많은 이로부터 경탄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수채화로 모로코를 그린 인물로 잘 알려진 스페인 화가 조셉 타피로 이바로(Josep Tapiró i Baró, 1836~1913)는 카탈로니아 레우스(Reus)에서 철물상점을 경영하는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림에 소질이 있어서 1849년 지역 상인이자 아마튜어 화가였던 도메넥 소베라노(Domènec Soberano)에게 배우면서 동료 학생이었던 마리아 포르토니(Marià Fortuny)와 첫 번 전시를 가졌다. 이어 1857년 포르토니와 함께 료차미술학교(Escola de la Llotja)에 입학하여 독일 나사렛운동(German Nazarene movement)과 관련 있던 화가 클라우디 로렌찰레(Claudi Lorenzale)에게서 배웠다. 그때 타피로는 역사적이며 종교적인 장면을 주로 그렸다.

이어 두 사람에게 로마로 가서 수업할 수 있는 경쟁의 기회가 주어졌는데 결국 포르토니가 선정되었고 타피노는 대신 마드리드로 가게 되어 산 페르난도 미술원(Real Academia de Bellas Artes de San Fernando)의 마드리드 분교(Escuela Superior de Pintura y Grabado)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그때 그를 가르친 사람은 페데리코 데 마드라소(Federico de Madrazo)였다.

1860년 바르셀로나로 돌아온 그는 건축물 장식 작업 등의 일을 하면서 그림을 그렸고, 이어 로마로 가서 포르토니와 합류하여 안티코 카페 그레코(Antico Caffè Greco) 등 그의 동료들을 알고 지냈다. 그리하여 그들과 함께 나폴리, 피렌체 등을 방문했고 수채화에 집중하면서 점차 풍속화(genre painting)의 세계를 나타내 유명해졌다.

그러다가 1871년 포리토니, 베르나르도 페란디스(Bernardo Ferrándiz)와 함께 탕헤르로 간 일이 그의 삶에 있어서 결정적인 일이 되고 말았다.

즉 1873년 로마에서 열린 오리엔탈리즘 주제의 전시회(International Art Circle of Rome)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이듬해 친구 포리토니가 갑자기 사망하는 일로 충격에 빠진 그는 로마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스페인으로 돌아가려던 그는 좋은 기억이 남아 있는 탕헤르로 발길을 돌려 1876년 그곳의 술탄 하산 1세(Sultan Hassan I)로부터 외교관 지위로 주재할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렇게 그곳으로 간 그는 메디나 구역 근처에 새로 지은 집으로 이사했고, 이어 오래된 극장을 자신의 스튜디오로 쓸 수 있었다. 그는 미국 뉴욕과 러시아의 상 페테스부르그 등지로 전시회 때문에 빈번하게 오갔지만 언제나 여름에는 레우스에서 가족과 함께했다.

1886년, 그는 20세의 마리아 마뉴엘라 발레레가 카노(Maria Manuela Valerega Cano)라는 이탈리아 혈통의 탕헤르 여인과 결혼하면서 마리아의 유대인 친구가 죽자 고아가 된 그녀의 아들을 바로 입양했다.

1905년이 되자 그의 유명세는 하락하기 시작했고 점차 그에게 호흡기 및 심혈관 장애가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종종 기운을 잃기 시작한 그는 그림 판매 촉진을 위한 여행도 매우 힘들어했다.

게다가 지역에 정치적인 소요와 반란 등이 이어져 외국 관광객들이 현저히 감소하면서 생활에 곤란을 겪기 시작했다. 1907년 부부는 마드리드에 집 한 채를 임차하여 그의 그림을 홍보하고자 전시를 열었지만 이미 건강이 악화된 그는 탕헤르에서 세상을 떠났다.

1947년 그의 고향 레우스의 노력으로 그의 유해가 탕헤르에서 포르토니 옆으로 이장되었고 그가 태어난 장소에는 기념패가 설치되었으며, 2013년 레우스 역사 미술관과 카탈로니아 국립미술관에서 그에 대한 회고전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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