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회장의 “임자 해봤어?”가 새삼스런 까닭

정주영 현대 회장의 소떼 방북은 “임자 해봤어?”와 상통한다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해보고 나서 이야기 하도록 하지!” 정주영 회장이 즐겨 사용하던 말이다. 사람들은 해보지도 않고 지레 겁을 먹고 안 될 이유부터 찾는다. 이와 비슷한 말이 2,500년 전에도 있었다.

<논어>(論語) ‘옹야편’(雍也編)에 보면 ‘역부족’(力不足)이라는 말이 나온다. 염구라는 제자가 공자에게 “선생님 말씀은 정말 훌륭하지만 실천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하였다. 그 때 공자는 “힘이 부족한 사람은 일을 하다가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이다. 미리부터 나는 할 수 없다고 자신의 능력에 한계를 그어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조선의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 선생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역부족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장진지효’(長進之效)를 강조했다. “길게 바라보고 꾸준하게 가다보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란 뜻이다.

‘성불제중’(成佛濟衆)하겠다고 서원을 한 사람이 힘이 든다고 중도에 그만두면 부처가 될 수 있을까?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은 부처는커녕 범부(凡夫)나 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목표를 정했다면, 우리 사전엔 역부족이란 단어는 없다. “될 때까지 노력하면 된다”는 것이 공자의 가르침이고 정주영 회장의 가르침이다.

필자가 피비린내 나는 사각의 정글에서 몸을 빼어 일원대도(一圓大道)에 귀의한 지 35여년이 지나간다. 사각의 정글에서 포효(咆哮)하던 한 마리 맹수가 뛰어 놀기에는 너무나 힘든 장소이고 세월이었다. 걸핏하면 뛰쳐나가 옛날의 동지들과 어울리고 싶은 충동에 얼마나 몸을 떨었는지···. 그러나 천만다행 내게는 호랑이보다도 더 무서운 조련사가 광증(狂症)이 발동할 때마다 무서운 채찍이 사정없이 날아왔다.

중국 명(明)나라 시대의 보명화상(普明和尙)이 지었다는‘목우십도송’(牧牛十圖頌)이 있다. 이 송(頌)을 읽으면 꼭 길 안든 미친 소와 같았던 나의 30년사를 더듬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든다. 장진지효란 이 ‘목우십도송’과 같은 경지를 이름이 아닐는지?

목우십도송은 이렇게 전개된다.

첫째, 길들기 전이다.
사납게 생긴 뿔에 소리소리 지르며/ 산과 들에 달려가니 길이 더욱 멀구나./ 한 조각 검정 구름 골 어귀에 비꼈는데/ 뛰어 가는 저 걸음이 뉘 집 곡식 범하려나.

둘째, 길들기 시작할 때다.
나에게 고삐 있어 달려들어 코를 뚫고/ 한 바탕 달아나면 아픈 매를 더하건만/ 종래로 익힌 습관 제어하기 어려워서/ 오히려 저 목동이 힘을 다해 이끌더라.

셋째, 길들어 가는 것이다.
점점 차차 길이 들어 달릴 마음 쉬어지고/ 물 건너고 구름 뚫어 걸음걸음 따라 오나/ 손에 고삐 굳이 잡아 조금도 늦추쟎고/ 목동이 종일토록 피곤함을 잊었어라.

넷째, 머리를 돌이킨다.
날 오래고 공이 깊어 머리 처음 돌이키니/ 전도하고 미친 기운 점점 많이 골라졌다./ 그렇건만 저 목동은 방심할 수 전혀 없어/ 오히려 고삐 잡아 말뚝에다 매어 두네.

다섯째, 길이 든다.
푸른 버들 그늘 밑 옛 시내 물가에/ 놓아 가고 거둬 옴이 자연함을 얻었구나./ 날 저물고 구름 낀 방초의 푸른 길에/ 목동이 돌아갈 제 이끌 필요 없었더라.

여섯째, 걸림이 없다.
한데 땅에 드러누워 한가하게 잠을 자니/ 채찍질을 아니 해도 길이 구애 없을러라./ 목동은 일이 없이 청송(靑松)아래 편히 앉아/ 한 곡조 승평 곡에 즐거움이 넘치더라.

일곱째, 헌거롭다.
버들 언덕 봄 물결 석양이 비쳤는데/ 담연(淡淵)에 싸인 방초 쫑긋쫑긋 푸르렀다./ 배고프면 뜯어 먹고 목마르면 물마시니/ 돌 위에 저 목동은 잠이 정히 무르녹네.

여덟째, 서로 잊는다.
흰 소 언제든지 백운중에 들었으니/ 사람 절로 무심하고 소도 또한 그러하다./ 달이 구름 뚫어 가면 구름 자취 희어지니/ 흰 구름 밝은 달이서와 동에 임의로다.

아홉째, 홀로 비친다.
소는 간 곳 없고 목동만이 한가하니/ 한 조각 외론 구름 저 봉 머리 떠 있도다./ 밝은 달 바라보고 손뼉 치며 노래하니/ 그래도 오히려 한 관문이 남아 있네.

열째, 일원상만 나타난다.
소와 사람 함께 없어 자취가 묘연하니/ 밝은 달빛이 차서 만상이 공했더라./ 누가 만일 그 가운데 적실한 뜻 묻는다면/ 들꽃과 꽃다운 풀 절로 총총(叢叢)하다 하리.

목표를 세워 놓고 역부족이라고 지레 포기를 할 것인가, 아니면 오직 ‘장진지효’가 있을 뿐인가? “자네, 해 보기나 했어?” 고 정주영 회장의 고함 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