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준 대사의 쓴소리···“듣기 싫은 말 들어야 성숙한 사회”

쓴소리에 귀를 열고, 시선은 멀리해 보자. 

[아시아엔=오준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 교수·전 유엔대사] 1970년대에 학교를 다닌 세대는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던 기억이 있다. 우리가 아직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을 이루지 못하던 시대에, 좋게 보면 정부가 국민을 계도하려 하였고, 나쁘게 보면 독재체제를 옹호하려고 한 것이다. 아무튼 그런 시대는 지났다.

이제 민주주의가 정착된 지도 30년에 가까워지고, 국가의 중요한 결정은 국민이 직접 또는 선출한 대표를 통하여 내리게 되었다.

그런데, 해외에 오래 근무하며 지켜본 외국의 민주사회와 비교해 볼 때 우리에게는 독특한 점이 있다. 민주적 의사 결정과정에서 치열한 의견 대립은 있는데, 그러한 대립을 해소하기 위한 합리적 토론은 많지 않다는 점이다. 이것은 단지 정치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고,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그런 것 같다.

현실사회에서 결정이 필요한 일들은 취사선택(trade-off)의 문제인 경우가 많다. 즉, A도 취하고 B도 가질 수 있는 게 아니고, 둘 중 하나는 포기하거나 덜 갖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어느 쪽을 택하는 게 바람직한가 하는 사회적 토의가 성공적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쉽게 보기 어렵다. 양자택일의 결과로 손해를 보게 될 사람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토론이 아닌 투쟁이 시작된다.

이렇게 되면 민주적 토론을 주도해야 할 정부, 언론, 전문가들도 어려운 선택을 강요하는 대신에 마치 A와 B를 모두 취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양쪽을 다 가질 수 있는 것이면 처음부터 왜 문제가 되었을까? 이것은 마치 축구경기에서 시간이 5분 남았고 우리나라가 0대2로 지고 있는데 아직 이길 수 있다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론적으로는 5분 동안에 5골도 넣을 수 있겠다.

그러나 “우리 선수들 끝까지 열심히 싸워서 두 골 이상 넣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응원을 하는 우리 팬들의 몫이지 전문 해설가가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전문가는 5분이 남은 상황에서 두 골을 넣을 가능성이 확률적으로 어느 정도 되는지 설명해줘야 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응원하는 해설가를 시청자들이 비판하는 대신에 환영한다면 그분은 앞으로도 계속 해설 대신 응원을 하지 않을까.

국가정책을 다루는 정부 부처에서 국민이 듣기 싫은 말과 선택을 기피하게 되면 손해는 국민이 보게 된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먼저 환경문제다. 미세먼지를 줄이기 위해 석탄 발전을 친환경 에너지로 전환하려면 비용이 들고 전기료 인상이 불가피한데, 국민들에게 환경 개선과 낮은 전기료 중 하나를 택하라는 불편한 질문은 아무도 안 하려고 한다.

정부는 대기환경도 개선하고 전기료도 낮게 유지할 수 있다는 태도를 보인다. 5분 동안에 3골을 넣는 것처럼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합리적이지 않다. 우선 듣기 좋은 이야기로 넘어가고, 결국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올 때까지 제대로 된 토론의 기회가 없어지니까 손해는 국민이 본다.

외교분야를 보자. 해외여행이 급증한 요즘은 국가 간의 관계를 다루는 전통적 외교 업무와 재외국민 보호라는 새로운 업무 사이에서 한정된 외교인력과 예산을 어느 쪽에 우선적으로 사용할 것이냐의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만일 우리 사회가 재외국민 보호에는 민감하게 반응하고 일반적 외교에는 무관심하다면, 재외공관은 외교보다는 영사 업무에 집중해서 우선 불평을 피하려 할 것이다. 해당 외교관들은 설사 외교 본연의 업무를 소홀히 했더라도 잘 지내고, 장기적인 외교력 저하라는 손해는 국민이 보게 된다.

국방분야에도 그런 문제는 가능하다. 병영에서 일어나는 군기 사고에 대하여는 철저히 지휘관의 책임을 묻고 군 병력이 제대로 된 전투능력을 유지하고 있는지에 대하여는 사회적 관심이 없다면, 지휘관은 힘든 훈련보다는 사고 예방에 중점을 두게 될 것이다. 막대한 국방예산을 부담하는 국민들은 국방력을 갖춘 군대가 아닌 사고 안 나는 군대를 갖게 되어 손해를 보게 된다.

끝으로 일기예보의 예를 들어보자. 맑은 날씨를 예보했는데 비가 오면 행사 차질 등으로 화가 나서 기상청의 예보 능력을 질타하고, 그 반대로 비가 온다고 했는데 날씨가 좋으면 아무도 불평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예보관의 입장에서는 불확실할 경우 일단 비가 온다고 해 두는 게 안전할 것이다.

우리가 많은 예산을 들여 기상예보 능력을 높이는 것은 정확한 예보를 받기 위해서지, 국민이 좋아하는 예보를 들으려는 게 아니다. 결과가 우리 마음에 들든 아니든 간에 정확한 예보를 평가하고 부정확한 예보를 비판해야 예보능력이 높아지지 않을까?

우리는 근세에 질곡의 역사를 살면서 생존이라는 절박한 공동과제 속에 토론을 통한 합리적 의사결정보다는 서로 마음을 나누는 것이 더 중요해졌는지도 모른다. 눈앞의 냉엄한 현실 속에서는 “괜찮아. 잘 될 거야”하는 말이 어떤 논리적 상황 분석보다 위로가 되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많은 발전을 이루었고 새로운 사회에는 새로운 시대정신이 필요하다.

흔히 독재정부가 비합리적 결정을 하게 되는 것은 독재자가 듣기 싫은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이 없어서 모든 선택지를 제대로 검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수의 국민이 결정권을 가진 민주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정부나 언론이나 전문가들이 국민이 싫어하는 말과 선택을 제시하길 꺼린다면, 결국 합리적 결정을 저해하고 국민에게 손해를 끼치게 될 것이다. 우리 국민이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라도, “뭐든지 잘 할 수 있다”고 하는 말을 의심하고 “어느 쪽을 선택할까요?”하는 듣기 싫은 말을 더 평가하는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하지 않을까? <서울대총동창신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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