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미켈란젤로·최영 장군 공통점은?
[아시아엔=오준 세이브더칠드런 코리아 이사장, 전 주유엔대사] 나는 어릴 때 북촌의 일본식 가옥에서 태어나 26년간 살았다. 중학생이 된 이후 지낸 2층의 다다미 방은 우리나라 겨울에는 맞지 않아서 늘 추웠던 기억밖에 없다. 그 방의 창문을 열면 서울 시내 맞은편의 남산이 손에 잡힐 듯 보였다.
아직 교통 혼잡이 없던 때라서 서울은 조용하였고, 비오는 밤 같은 때는 서울역의 기차 기적소리가 들렸다. 학생 시절 한밤에 멀리서 들리는 기적소리는 가슴 속에 뭉클하고 감성을 자극해서 잠 들기 어렵게 했다. 누군가 저 기차를 타고 머나먼 미지의 세계로 떠나겠구나 하고 센티멘털해지면 라디오에서 나오는 모든 음악이 눈물을 고이게 했다.
기적소리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던 감수성은 나이가 들수록 무뎌졌다. 이성과의 만남에 가슴 뛰던 낭만도, 외국에 나가 이국적인 분위기에 들뜨던 흥분도, 친구들과 밤늦게 술을 마시며 세상 모든 일을 아는 것처럼 떠들던 치기도, 나이가 들면서 거짓말처럼 점점 사라진다.
의학적으로도 중년을 넘어서면 신체의 모든 기능이 떨어지니까, 감각을 담당하는 부분도 쇠퇴하는 게 당연할 일 같다. 그래도 무뎌지는 감수성이 서글프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역발상을 해서 감수성이 떨어짐으로써 생기는 긍정적인 면을 생각해 본다.
생각해 보면, 인간의 신체 기능과 감각은 다른 모든 생명체와 다르지 않다. 생명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이다. 우리는 개체로서 생존하기 위해 음식을 먹고, 종족으로 생존하기 위해 짝짓기를 한다. 우리가 타고 난 본능은 배가 고프면 먹는 게 제일 중요하고, 성장하면 이성을 만나 짝짓기를 하는데 집중하도록 요구한다.
종교를 가진 사람은 신이 우리에게 그런 본능을 주었다고 할 것이고, 종교가 없으면 생명의 진화를 통해 그렇게 되었다고 설명할 수 있다. 어쨌든 인간이 본능을 거부해서 먹지 않거나 짝짓기를 하지 않고 버틸 수 있다면 인류는 멸종의 위기에 직면할 것이다.
두뇌가 발달한 인간은 그러한 원초적 본능을 단순히 먹고 짝짓기 하는 용도를 넘어 여러 가지 오락과 예술로 승화시켰다. TV의 수많은 먹방과 멜로드라마가 왜 인기가 있는지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된다.
학자들은 우리 신체의 기능과 감각이 생명의 사이클에 맞게 되어 있다고 한다. 나이가 들면 민감한 감각이 필요하지 않게 되니까 자연히 없어진다고 할까. 과거에는 생물학적 기능과 감각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남은 여생이 길지 않았지만, 평균수명이 늘어나면서 달라졌다.
1960년 52세에 불과했던 우리나라 평균수명은 이제 80세를 넘어섰다. 무뎌진 감각으로 살 수 있는 시간이 길어진 것이다. 그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감각을 유지하려고 하는 대신, 오히려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자면, 젊었을 때 넘치는 성적 충동 때문에 이성과 함께 동료로서 일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방해물이 없어지는 셈이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도 너무 빠지지 않으면서 적당히 즐길 수 있다. 친구들과 술을 마셔도 약간 흥분하고 즐기는 선에서 치기를 다스릴 수 있다.
젊었을 때는 ‘적당히 즐긴다’는 표현 자체가 이해되지 않아서 나중에 후회할 실수를 종종 경험해 본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금방 안다. 다시 말하면 나이가 들면서 감각에 지배되지 않고 내가 감각을 지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늘어난 수명으로 과거보다 훨씬 긴 시간을 ‘통제 가능한 감각’으로 살 수 있게 되었다. 그 시간이 주는 장점을 활용해서 생산적으로 활동할 수 있다. 물론 높은 감수성이 있어야만 잘 할 수 있는 일에는 불리하겠지만, 그 반대의 상황도 많다.
감성보다 이성이 더 요구되는 분야는 물론이고, 감성이 필요한 경우에도 절제의 미덕을 발휘해서 감성을 승화시킬 수 있다. 인간의 수명이 40살이 되지 않던 시절에도 소크라테스는 71세까지 활동하였고, 미켈란젤로는 88세에 별세하기 1주일 전까지 피에타 조각을 만들었다. 우리나라에도 이미 7백년 전에 72세까지 현역이었던 최영 장군 같은 분이 있었다. 어쩌면 이들이 모두 노년에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