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형의 커피심포니] “커피는 음악으로 말하면 크레센도···‘프랑스 자유주의’의 뿌리”
[아시아엔=이동형 CCA 커피로스터] “리베르테(자유)” “에갈리테(평등)” “프라테르니테(박애)”
1789년 여름, 군중들은 노래하듯 이렇게 외치기 시작했다. 바스티유 감옥으로 돌진하는 군중들은 타락한 왕실과 귀족들 횡포에 쌓였던 불만을 터트렸다.
민중들은 “인간은 동등하게 벌거벗고 태어났기 때문에 신성한 인권을 보장하는 새로운 계약을 체결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며 새로운 시대를 갈망했다. 계몽사상을 이끌어내며 혁명의 도화선로 작용한 ‘사회계약’을 펴낸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는 당시 프랑스 음악을 향해서도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화성은 조화롭지 못하고, 선율은 부자연스러우며, 음악의 흐름 또한 억지스럽다. 프랑스 음악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미래도 없다.”?(‘프랑스 음악에 대한 편지’ 중에서, 1753년)
저주에 가까운 이 같은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인 사람이 프랑수아-조제프 고섹(Fran?ois-Joseph Gossec)이다. 오페라극장 가창 학교 교장이었던 그는 벨기에 농노 출신으로 바스티유 습격이 발발하자, 프랑스 왕실과 관계를 끊고 대혁명의 물결을 찬양하는 음악을 작곡해 민중들로 하여금 더욱 소리 높여 노래하게 했다.
오페라 ‘공화국의 승리’ ‘자유에의 헌신’이 그랬다. 바스티유 감옥의 습격을 기념하기 위해 작곡된 ‘테 데움(Te Deum)’은 300명 이상의 악기 연주자와 1000명 이상의 합창단원이 부르는 곡이니 그의 의도는 분명했다.
고섹이 바라본 것은 민중이었다. “화성은 조화롭지 못하고, 선율은 부자연스럽고, 음악의 흐름 또한 억지스럽다”는 루소의 지적을 받아들여 딱딱하지 않으면서 모호하지 않은 명확한 음악을 추구했다. 그는 1769년 ‘아마추어 음악회’를 창립해 기부로 운영되는 ‘기부음악’을 새롭게 시도했다. 그는 대중음악의 수준을 귀족 음악의 수준으로 올려놓기 위해 애썼다. 그렇기에 대혁명이 발발했을 때 미련없이 왕실 오페라단 지휘를 그만둘 수 있었다.
그가 조직한 ‘아마추어음악회’는 자금난 때문에 중단되었지만 그의 정신은 ‘올림픽 지부 음악회’로 연결되면서 정신이 이어졌다. 그의 사망 한참 후인 1895년에는 회원수가 남자 300명, 여자 102명에 달했다. 귀족으로 국한하지 않아 은행가, 의사, 출판업자 등이 가입할 수 있었다.
유럽에서는 1573년, 독일 의사 라우볼프에 의해 처음 언급된 커피는 이후 교황 클레멘스 8세가 세례를 줘 공공연하게 마실 수 있게 될 때까지 30여년간 몰래 마시는 음료였다. 커피에 대한 교황의 세례는 사제들과 민중들의 간청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전언이다. 커피는 신분을 초월해 모든 계층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커피는 민중을 위한, 민중에 의한 음료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프랑스인들은 함께 커피를 마시면서 더 나은 미래를 꿈꾸었다. 파리의 커피하우스는 볼테르(Voltaire)와 장 자크 루소 등 사상가들의 아지트였다. 커피를 사랑했던 볼테르와 루소는 ‘카페 르 프로코프’의 단골손님이었다.
커피를 마시며 토론하기를 좋아했던 계몽사상가들과 예술가들에게 커피는 단순한 기호음료가 아니었다. 커피하우스는 누구나 찾아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자유롭고 평등한 공간이었다. 귀족들의 폐쇄적인 살롱과 달랐다. 커피 한 잔을 사이에 두고 계몽주의자들은 치열하게 토론하면서 오늘의 프랑스, 오늘의 자유주의를 계획했다.
프랑스를 넘어 세상을 변화시켰던 루소는 죽음 앞에서 “아, 더 이상 커피잔을 들 수 없구나!”라고 한탄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간절히 바라던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개혁은 카페에서 보다 정제됐다. 루소는 한 잔의 커피를 곁에 두고 사상을 완성시키며 사회 개혁의 꿈을 키워 나갔다. 그런 점에서 커피는 음악에 비유한다면 ‘혁명의 크레센도(crescendo, 점점 강하게)’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커피가 온 몸으로 퍼져 에너지를 높여 나가는 만큼이나 한 개인의 정신적 각성에서 시대적 계몽으로 세력을 몰아가는 커피의 위력은 크레센도가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