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형의 커피심포니②] 카페문화의 산실 프랑스···“함께 부르고 함께 마시자”
“무기를 들어라, 시민들아! 대열을 갖춰라! 전진, 전진하자!”
[아시아엔=이동형 CCA 커피로스터] 1792년 4월 20일, 프랑스 혁명정부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면서 대혁명은 절정에 달했다.
사연은 이랬다. 프랑스대혁명의 성공에 대한 두려움, 정확하게는 대혁명 이념과 열기가 자국에 전파되는 것을 두려워한 주변국가들이 작센의 필니츠성에 모였다. 이들은 “만약 광신적인 악업으로 전하(루이 16세)에게 위해를 가한다면, 외국 열강의 군대가 파리를 초토화시킬 것임을 파리 시민은 알아야 한다”면서 “전하를 구출하기 위해 모든 무력을 사용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프랑스 혁명정부는 분노했다. 인민들을 구출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오스트리아령이던 네덜란드를 공격하기로 했다. 하지만 귀족 출신의 대다수 지휘관들이 혁명 과정에서 숙청당한 탓에 군대를 지휘할 사람이 부족했고, 심지어 전쟁을 시작한다는 소식에 병사들이 집단 탈영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진 혁명군대를 상대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연합군이 계속해서 진군을 했다. 혁명정부를 피해 망명을 떠났던 프랑스 귀족들까지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오자 프랑스공화국은 위기에 처했다.
이에 프랑스 의회가 “조국이 위기에 빠졌다”고 발표하자 프랑스 각지에서 의용군이 파리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이때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 출신 농민 700명도 파리로 달려갔는데 모두 한 목소리로 군가를 부르며 입성했다. 그들이 부른 노래가 프랑스의 국가(國歌)인 ‘라 마르세이예즈’다. 마르세유 의용군의 기세는 전 프랑스혁명군을 자극했다. 함께 노래하며 사기가 오른 혁명군은 프랑스 동북부 발미(Bataille de Valmy)에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연합군을 격퇴하기에 이르렀다.
이 노래는 혁명군 공병대위 클로드 조제프 루제 드 릴(Claude Joseph Rouget de Lisle)이 군대의 출정을 독려하기 위해 작곡했지만 마르세유 농민들이 부르면서 프랑스 전역의 국민들을 자극했다. 그 기세를 몰아 전쟁에 승리한 이후 프랑스인들에게 더욱 사랑을 받았다.
프랑수아-조제프 고섹이 합창곡인 ‘자유에의 헌신’에 삽입하면서 그야말로 ‘민중의 노래’가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793년 “주권은 인민에 속한다”는 최초의 프랑스공화국 헌법이 발효되고 프랑스 제1공화국이 선포됐다. 이 곡은 동시에 공화국의 노래, 국가로 채택된 것이다. 이후 나폴레옹왕조부터 부르봉왕조까지 금지되다가 1879년 다시 국가로 인정받았다. 과격함과 배타주의적 내용 때문에 오늘날까지 부침을 거듭하기도 한다.
프랑스인들은 혼자보다 함께 부르는 것을 선호했던 것 같다. 프랑스혁명 59년 전인 1730년, 헨델이 프랑스 음악을 본떠서 영국 오페라에 합창을 도입한 사실에서 프랑스 문화의 핵심에 합창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사실 프랑스 사람들이 커피를 즐기는 문화에서도 합창문화를 엿볼 수 있다.
그들에게 커피는 곧 카페(caf?)다. 혼자 집에서 마시는 게 아니라 함께 즐기는 음료인 것이다. 그들에게 카페는 만남과 소통을 의미한다. 테이크 아웃 커피에 대한 이용도가 다른 나라보다 유독 떨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프랑스인의 마음에는 대화하는 커피, 토론하는 커피, 생각하는 커피라는 개념이 깊이 새겨져 있다.
‘카페 레 두 마고(les deux magots)’가 프랑스의 문화재로 지정된 것에서 그들이 카페를 얼마나 문화적으로 여기는지 알 수 있다.
볼테르·발자크·루소와 나폴레옹이 사랑했던 ‘카페 프로코프(caf? procope)’, 사르트르의 ‘카페 드 플로어(caf? de flore)’. 그리고 피카소·카뮈·헤밍웨이의 ‘레 두 마고 (les deux magots)’에서는 지금도 프랑스인들이 모여 사상과 문화, 예술을 나누고 토론한다. 프랑스를 생각으로 이끌고 예술과 문화를 꽃피우게 한 것은 커피, 아니 카페의 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