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순의 커피인문학] 커피와 인류, 누가 더 똑똑한가?
[아시아엔=박영순 <아시아엔> 커피전문기자] 커피는 생각할수록 참 영악(靈惡)하다. 생명체마다 나름대로 생존과 번식 능력을 타고 난다지만, 커피는 특이한 구석이 있다. 같은 커피라도 로부스타 품종은 벌과 나비를 유혹해 번식하고, 아라비카 종은 자가수분을 한다. 개화기면 로부스타 나무들이 심겨진 산은 마치 눈이 내린 것 같다. 오랜 진화과정에서 수분매개체인 벌과 나비를 보다 많이 끌어들이기 위해선 꽃을 되도록 풍성하게 피워내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친 것이다. 아라비카의 꽃은 상대적으로 강렬하지 않다. 벌이 없어도 번식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로부스타 품종은 대체로 해발고도가 1000m를 넘지 않는 지역에서 곤충, 벌레들과 어우러진 채로 살아간다. 이런 전략은 번식의 가능성을 높이지만, 동시에 큰 위협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나무를 공격하는 해충과 박테리아도 득실거리는 탓이다. “모험이 없는 곳에 이익도 없다(Nothing Venture Nothing Have)”는 투자 세계의 철칙과 통하는 이치라 하겠다.
그러나 커피는 결코 무모하지 않다. 로부스타 품종은 체내에 아라비카 종보다 2배 가량 많은 카페인을 품고 있다. 카페인은 식물들이 자기 방어를 위해 만드는 알칼로이드(Alkaloid) 계열의 물질로 식물계에 널리 분포하는데, 동물에 대해서는 강한 생리작용을 발휘한다. 해충이 커피 열매 뿐 아니라 잎사귀나 줄기의 즙을 빨아먹다가 카페인을 섭취하게 되면 온몸이 마비되면서 죽게 된다. 커피는 수백 세대 동안 병충해와 결전을 치러오면서 카페인을 아예 DNA 수준에서 미리 준비해놓는 장치를 획득했다.
다른 식물보다 커피에 특히 많이 농축돼 있는 바로 이 카페인이 ‘영악함의 진수’이다. 카페인은 나무 구석구석을 갉아 먹는 벌레를 쫓거나 죽이는 역할을 하는 데만 그치지 않는다. 커피나무는? 꿀벌이 다시 자신을 찾아오도록 꽃에 미량의 카페인을 숨겨둔다. 꿀벌이 쓴맛을 감지해 거부감을 느낄 정도가 아니라 기억을 높이는 각성효과를 내는 정도의 강도인 것이다. 영국 뉴캐슬대의 연구결과, 꿀벌은 카페인이 들어 있는 꽃을 들어 있지 않는 꽃보다 3배나 더 잘 기억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정이 이렇다면, 커피나무와 꿀벌 중 어느 쪽이 더 고등한 지 혼란스럽지 않을 수 없다.
커피나무가 잎사귀에 담아둔 카페인은 낙엽이 진 뒤 또 하나의 미션을 수행한다. 땅에 떨어진 잎사귀에서 카페인이 흘러나와 주변으로 스며든다. 이때 카페인은 커피가 아닌 다른 종의 식물이 발아하거나 성장하는 것을 억제한다. 개체 하나만을 위한 임무가 아니라 종족 전체를 위해 서식지를 개척하고 확보하는 일종의 합동전략인 것이다. 나무들이 화학물질을 통해 소통하면서 보다 ?‘큰 일’을 수행하는 것을 ‘타감작용(Allelopathy)’이라고 한다. 붉게 물드는 단풍나무의 잎에서도 안토시아닌이 땅속으로 스며들어 다른 식물의 성장을 억제한다. 소나무는 햇빛을 많이 받기 위해 다른 나무들이 자라지 못하도록 피톤치드와 같은 물질을 내뿜는다. 마늘의 알리신, 고추의 캡사이신도 타감작용을 수행하는 물질들이다. 무리를 위해 살아가는 모습이 인간사와 다르지 않다. 우리 눈에는 한없이 하등하게 보이는 한낱 식물일지라도 생존 방식에서 인간이 배워야 할 중요한 지혜가 있다.
이쯤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우리가 커피를 이용하는 것인가, 커피가 인간을 활용하는 것인가? 시쳇말로 누가 더 머리 꼭대기에 있느냐는 물음이다.
커피가 번식을 위해 카페인으로 길들이는 대상은 돌이켜 보니 꿀벌 만이 아니다. 커피나무라는 하나의 종을 지구 전체에 널리 퍼지게 하는 게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인간이다. 인류 역사에서 단시간에 이토록 많은 나무를 곳곳에 퍼트린 사례를 찾기 힘들다. 카페인의 각성작용은 지금 이 순간도 지구촌의 수많은 사람들을 커피에 빠져들게 하고 있다. 인류가 커피나무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