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비추어리] 유색인종 최초 IOC 위원장에 도전한 ‘스포츠 영웅’ 김운용
[아시아엔=박명윤 <아시아엔> ‘보건영양’ 논설위원, 한국보건영양연구소 이사장] 한국 체육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통하는 김운용(金雲龍) 前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부위원장이 86세를 일기로 10월 3일 타계했다. 그는 2일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고, 다음날 3일 오전 2시 21분 별세했다.
고인은 세계 스포츠계에서 역대 한국인으로는 가장 높은 자리인 IOC 부위원장 자리에 올라갔으며 우리나라의 국기(國技) 태권도가 2000년 시드니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고인은 2015년 11월 한국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양정모(62)와 제5회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 최우수선수인 박신자(74)와 함께 ‘스포츠영웅’으로 선정돼 ‘스포츠영웅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김운용은 1931년 3월 19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본 구주대학을 졸업하고 대구에서 조선민보사 기자로 활동했으며, 어머니는 서울 태생으로 신세대 여성이었다. 김운용은 아버지가 급성폐렴으로 사망한 후 어머니를 따라 상경했다. 서울 앵정소학교(현 덕수중)에 입학했으며, 학창시절 김운용은 권투, 유도, 스케이팅, 공수도(空手道) 등 운동에 남다른 소질이 있었다. 또한 공부도 잘 했으며, 특히 영어를 잘해 외교관이 꿈이었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2학년 때인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통역장교로 입대하여 능숙한 외국어 실력으로 UN 연락장교로 선발되어 근무했다. 미국 육군보병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955년에는 미국 텍사스주의 웨스턴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1961년 육군 중령으로 예편한 후 뛰어난 영어실력을 인정받아 1961-63년 군정(軍政)하에서 내각수반의 의전비서관으로 근무했다.
김운용은 1961년 연세대 정치학과 석사과정, 1963년에는 박사학위 과정을 수료했다. 민정(民政)으로 이양된 1963년부터 68년까지 주미 한국대사관 참사관, UN주재 한국대표부 참사관, 주영 한국대사관 참사관을 역임했다. 1968년 1월 23일 북한이 원산항 앞 공해(公海)상에서 미국 해군 소속 정보함 푸에블로(USS Pueblo)호를 납치한 사건이 일어나자 박종규(朴鍾圭, 1930-1985)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이 김운용을 대통령경호실 보좌관으로 발탁했다.
김운용이 태권도(跆拳道)계에 입문하게 된 것도 1971년 박종규 경호실장의 요청에 의해서였다. 대한태권도협회(Korea Taekwondo Association)는 이미 1961년 창립되었으나 파벌이 난립한 가운데 한국을 대표하는 무도로서의 위상을 목표로 단일화할 필요성을 느끼고 김운용을 회장으로 영입했다.
박종규의 지원 아래 대한태권도협회 제7대 회장으로 취임한 김운용은 취임 초부터 의욕적인 사업을 펼쳐 1971년 4월 15일 계간 <태권도>지 창간호를 발간했다. <태권도>지 발간은 당시 130만 태권도인에게 기술적인 측면의 이론화와 최초로 협회 공인 <태권도교본>(‘품새’편)’ 발간(1972년)은 통일된 기술의 발전에 밑거름이 되었다.
김운용은 뛰어난 외국어 실력과 폭넓은 대인 관계로 국제 스포츠 관계자의 신망을 얻어 1992년에는 국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에 당선되었다. IOC 집행부는 임기 8년의 위원장 1명, 임기 4년의 부위원장 3명과 이사 5명이 있으며 모두 투표로 선출한다. 위원장은 임기 8년에 이어 한 차례에 한 해 4년 중임 할 수 있다. 김운용은 1990년대 가장 영향력이 있는 세계 스포츠계 인사들 중에서 2위로 평가받았고, 유럽 언론에서도 ‘포스트 사마란치’로 그를 손꼽아 동양인이 사상 최초로 IOC 위원장이 될 가능성도 점쳐졌다.
김운용은 2001년 7월 제112차 모스크바 IOC 총회에서 치러진 IOC 위원장 선거에 출마하여 유색인종 최초로 백인 전유물이었던 ‘세계 스포츠 대통령’에 도전했다. 그는 IOC가 지나친 상업주의에서 벗어나 올림픽의 근간인 청소년 교육과 평화 추구하는 올림피즘(Olympism)을 최대한 살리겠다고 위원장 선거에 출사표를 던졌다.
하지만 선거운동 과정에서 솔트리에크시티 동계올림픽 개최지 뇌물스캔들이 불거지면서 그의 도덕성이 집중적으로 공격을 받았다. 그리고 120명의 IOC 위원 가운데 50%가 유럽파인 탓에 김운용에게 불리했으며, 사마란치 위원장의 방해공작으로 2차 투표에서 김운용은 23표에 그쳐 59표를 얻은 벨기에의 자크 로게에게 패했고, IOC 부위원장 자리에서도 물러나게 되었다.
김운용은 IOC에서 불거진 스캔들과 함께 한국태권도계를 오랜 기간 지배해 온 그의 영향력에 대한 후유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독단적으로 대한태권도협회 운영에 개입했으며, 그 과정에서 횡령혐의가 있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김운용은 각종 의혹으로 2002년 대한체육회 회장직에서 물러난 데 이어 세계태권도연맹 후원금 유용 등의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에 김운용은 IOC 위원 제명 위기에 몰려, 2005년 7월 싱가포르 IOC 총회를 앞두고 IOC 위원직을 사퇴했다.
한편 김운용의 영향력으로 태권도가 1988년 서울올림픽과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의 ‘시범종목’으로 채택되었으며 이어 1994년 IOC 총회에서 2000년 시드니올림픽의 ‘정식 종목’으로 결정되었다. 김운용은 시드니올림픽 남북한 동시입장과 2002년 한일월드컵 유치에도 기여했다.
2005년 이후 김운용은 칩거생활에 들어간 그는 국내 스포츠계에서는 조용히 활동을 계속했다. 2016년에는 한국 스포츠 발전과 스포츠 외교 강화, 태권도 육성과 세계화를 목적으로 ‘사단법인 김운용스포츠위원회’를 설립했다. ‘김운용컵 국제오픈태권도대회’를 오는 10월 28일-11월 1일 개최할 예정이었다.
김운용은 지난 2000년 새천년민주당 전국구 의원으로 제16대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으며,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할 때 동행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김운용은 ‘나는 은퇴한 사람’이라며 현안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평창동계올림픽에 북한 참가 관련 조언을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