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비추어리] 이란 개방 이끈 라프산자니 대통령···호메이니 시대 실력자 핵개발 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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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엔=아미라 이스마일 <아시아엔> 인턴기자] 악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는 1934년 이란 남동부 케르만 지역 라프산잔에서 부유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거룩한 도시’ 쿰(Qom)에서 아야톨라 호메이니와 함께 신학을 공부하다 아야톨라를 따르게 된다. 라프산자니는 이후 이란의 팔레비 국왕 시절 몇차례 체포를 당한다. 호메이니는 라프산자니를 1980년 이란-이라크전쟁 후반에 군사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이후 라프산자니는 이란이 종전을 이끌어낸 유엔안보리 결의안에 동의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라프산자니는 1979년 혁명 이후 국회의장과 제5, 6대 이란 대통령(1989~1997년) 등 이슬람공화국 최고직을 지낸다. 대통령으로서 그는 이란과 서방의 관계가 좋아져야 국가경제가 발전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의 정부는 ‘친미’라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잠시 물러난 후 1993년 재선에 성공하며 권력을 유지한다. 그는 2006년, 88명의 학자와 성직자들이 참여하는 헌법기관인 ‘전문가위원회’에 들어가 2007년 위원장으로 취임했다. 이란의 최고 지도자를 탄핵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은 것이다.

CNN에 의하면 라프산자니가 이란 정치에 미친 영향은 그의 공식직함을 훨씬 능가한다. 그는 투사로 샤의 친미정권과 싸웠지만 이란-이라크 전쟁 종식 이후 대통령에 당선되어 폐허가 된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시장경제 개혁을 주장하는 등 격동의 이란 현대사를 몸소 겪었다.

라프산자니는 이란의 핵개발 프로그램에 깊이 관여했다. 그러나 그는 훗날 대량 파괴무기는 이슬람의 원칙에 어긋난다며 자신의 과거 행적을 부정한다. 그는 미국과 우호 관계를 맺기 위해 수차례 노력했으며, 이란의 무기개발은 절대 미국을 향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물론 그의 호언장담이 양국의 ‘계산’에 변수가 되지는 못했다.

대통령으로서 라프산자니는 이라크에 전후 구호물자를 보내는 등 주변국가들과 우호관계를 유지했지만, 외교보다 내정에서 더 많은 업적을 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학교와 산업이 협력하여 일자리를 만들 것을 촉구하는 등 그가 시행한 개혁들은 특히 자유무역 및 대서방 교류에 주춧돌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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