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인’ 인생 차민수①] 당신은 언제 뭔가에 올인해 본 적 있는가?
노무현 새정부 출범 직전인 2003년 1월22일 밤 10시 조금 넘은 시각, 서울 도심이 한산하기만 했다. 추운 겨울밤 탓이라고들 여겼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바로 1주일 전 <SBS>가 수목드라마로 시작한 ‘올인’의 3회분 방송을 보기 위해 텔레비전 앞에 모인 까닭이었다.?세계적인 포커게이머이자 프로바둑기사 차민수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리며 이병헌·송혜교·지성·박솔미 등이 열연한 ‘올인’은 지금도 30대 이후 팬들의 뇌리에 박혀 있다. ‘올인’은 60%대를 웃도는 전대미문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4월3일 24회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아시아엔>은 미국 LA에 거주하고 있는 차민수(66)씨의 자취를 기록으로 남겨달라고 당부했다. 차 교수는 애초 “이미 드라마를 통해 많은 부분이 알려졌고,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아시아엔>은 “2003년 이후의 역정과 특히 게임산업 및 4차산업혁명시대에 한국이 찾아야 할 일자리·먹거리에 대한 당신의 탁견을 듣고 싶다”고 재차 집필을 요청하자 마침내 수락했다.?이에 차 교수는 지난 8월 10일 1차분으로 원고지 450매 분량의 글을 보내왔다. 이 기록은 일종의 ‘세미 회고록’이 될 것이다. 지난 23~28일 인도네시아 방문을 마치고 9월 2일 다시 미국으로 출국하는 차 교수는 추가 원고를 계속 집필하기로 약속했다. <아시아엔>은 30여회에 걸쳐 ‘프로겜블러 차민수의 삶’을 연재한다.-편집자
[아시아엔=차민수 드라마 ‘올인’ 실제 주인공, 강원관광대 교수, <블랙잭 이길 수 있다> <차민수의 로·티·플-포커 세계챔피언이 쓴 승률 97% 승률 포커> 저자] 나는 1.4후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피난 중에 수원 인근에 있는 발안 장터에서 태어났다. 엄동설한으로 무지도 추웠다던 1951년 1월 15일 피난민들이 가득한 방에서였다. 남자들은 밖으로 내보내고 여자들만 남아서 아이를 받았다고 한다.
1950년 9.28 서울수복 후 아버지(차용득, 1916~1951)가 영등포에 지으신 집으로 돌아오신 어머님(이기연, 1920~2014)은 어린 핏덩이를 안고 허구한 날 한없이 우셨다고 한다. 그 때 어머님 나이 30세였다.
어머님께서는 “나도 젊은 나이에 남편처럼 갑자기 떠날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셨다. 만약에 내가 잘못되면 재산은 조금 있으나 큰 아이들이 다 갖고 어린 동생은 주지 않을까 생각하시고 막내는 스스로 먹고 살 수 있는 재주를 가르쳐야겠다고 마음 먹게 되셨고, 어린 시절부터 내 자신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운동과 돈이 될 수 있는 모든 걸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그 덕택에 나는 운동으로는 당수·쿵푸·스케이트·수영·탁구 등을, 음악 가운데는 바이올린·기타·피아노를 배웠다. 바둑에 특별한 재주를 보여 1974년 프로에 입문하게 되었다. 미술은 뒤늦게 조동화 선생님께 배워 개인전을 열기도 하였다.
어려서 배운 것이 10여 가지 정도 되었고 그 중 여러 곳에서 프로의 경지에 올랐다. 어려서 길을 잃고 다칠까 걱정해 집안 일을 도와주시는 충청도 할머니 손을 잡고 레슨 가방을 들고 방과 후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레슨 받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다.
당시에는 보릿고개라 하여 먹고 살기 힘든 시절로 자식에게 특별히 재능을 가르치기 위해 개인레슨을 시킨다는 것은 보통 집에서는 있기 힘든 일이었다. 주일(일요일)을 빼고는 친구들과 함께 뛰어놀 수 없어서 어려서 나는 어머니를 원망하곤 했다. 더욱이 어머님은 내게 스파르타식으로 교육을 시켰다.
어머님의 지론은 이랬다. “돈이나 물건은 남이 훔쳐갈 수 있으나 너의 머리 속에 있는 것은 도적질해 갈 수 없다. 돈은 잘못 투자하거나 운이 나빠서 잃을 수도 있지만 배운 지식이나 기술은 너의 몸과 머리 속에 항상 남아있는 것이다.”
어머님의 첫번째 소망은 내가 의사가 되어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었으면 하는 거였다. 두번째는 목사가 되어 목회자의 길을 갔으면 하셨다. 어머님의 소망은 소망으로만 남았다. 벼락치기 공부로 간신히 유지만 하였지 학교공부에는 취미를 느끼지 못했다.
나는 학생 때 부끄러움을 많이 타 대중들 앞에 서면 울렁증이 생겨 말도 변변히 하지 못했다. 대중 앞에서 이야기 하려면 얼굴이 빨개지고 숨이 차고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중학생 때 영락교회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초청받아 연주를 가게 되었다. 돌아와 보니 그날 우리 교회 중등부 회장선거가 있었는데, 나를 회장으로 이미 뽑아 놓았다. 회장이 매주 광고를 하여야 하는데 처음에는 다리도 후들거리고 무척 힘이 들었다. 숙달이 되면서 울렁증은 없어지고 차차 정상적으로 되었다.
어린 시절 나는 유난히 영화를 좋아했다. 집 앞에 있는 영보극장 앞에 가서 무작정 아는 이나 동네 아저씨 얼굴이 보이면 달려가 나를 데리고 들어가 달라고 졸랐다. 그렇게 들어갈 때도 있었지만 “이 아이도 돈을 내야 된다”고 하면 다시 하염없이 극장 앞에서 동네 아저씨를 기다렸다. 해가 질 때까지 그런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당시 동네 집집마다 지붕 위에는 놀던 고무공이나 제기가 많이 있었다. 나는 장독대를 통해 지붕 위로 올라가 이집 저집 지붕을 건너다니며 공이나 제기를 주웠다. 이를 본 이웃집 아주머니가 어머니에게 알리면 어머니는 “민수야, 민수야” 하고 부르신다. 위험한 짓을 한다고 야단은 맞았지만 내 손에 가득 들린 ‘전리품’을 보고 나는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어머님을 가장 사랑했다. 어머님이 원하는 의사도 목사도 되지 못했지만 말이다. 청개구리처럼 어머님 기대와 반대로만 살았다. 어머님 속을 지독히도 썩였다. 우리 집안에는 나 같은 아이가 없었다. 누님 둘은 이화여대 피아노학과를 졸업했고, 형님은 한양대 공대 건축학과를 졸업했다.
나는 집에서 돌연변이 혹은 피난 때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라는 말을 노상 들으며 자랐다. 생긴 것도 조금 달랐다. 형제들은 아버지를 닮아 다 눈이 큰데 비해, 나는 어머니를 닮아서 형제들보다 눈이 작았다. 형제들은 나더러 단추구멍이라고 놀려대곤 했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때,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나에게 어머님은 곧 아버지이셨고, 또 어머님이시도 했다. 자신에게는 한없이 검소하셨으며, 남에게는 한없이 후하신 어머님은 늘 “나보다 부족한 남을 도우며 살아야 한다”고 교육하셨다.
예전 영등포 동회(동사무소) 앞에는 노동자들이 잘 다니는 값이 저렴한 백반집이 있었다. 음식값은 천원으로 싼 데다 맛 또한 좋았다. 나는 한국에 올 적마다 어머니가 즐겨드시는 백반 집에 자주 따라 가곤하였다. 어머니가 가시면 회장님이 오셨다고 자그마한 생선 하나라도 더 주며 극진하게 대했다.
그래서 짜장면보다 값이 싼 백반집만 가셨는지 모른다. 자신을 위하여 하루에 천원을 쓰며 아끼시는 분이 장학금으로는 2억~3억을 흔쾌히 내놓으시는 것을 보고 나는 많은 의아심을 가지곤 했다. 자신을 위해 좋은 옷도 입으시고 비싼 음식도 드시며 큰돈을 쓰실 일이지 생면부지인 사람에게 몇억을 내놓는 이유가 궁금했다. 어머님의 지론은 간단했다.
“나 자신 하나도 간수하지 못한다면 무엇이 되겠는가? 너는 커서 큰 나무가 되어 사람들이 너의 그늘에서 쉴 수 있도록 그런 사람이 되거라.”
배운 사람이면 남에게 도움을 주며 사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면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몸으로 실천하며 사신 분이다.
매년 300여 교회의 선교활동을 지원하며, 도움을 요청하는 개척교회의 도움을 단 한번도 거절하신 적이 없으셨다.
그렇게 도움을 주면서도 하시는 사업은 번창하여 재산이 한번도 줄어본 적이 없었다. 하나님 은혜를 정말로 듬뿍 받으신 분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전국여전도회 회장을 10년 이상 하셨다. 당시에는 재력 있는 분이 별로 없어서 돈을 쓸 사람이 없어 당신이 오래 맡으셨다고 하셨다.
나는 지금도 내 어머님이 하나님 우편(右便)에 앉으셔서 사랑하는 아들을 지켜주신다고 믿는다. 나의 자그마한 재능도 하나님께 부탁하여 만들어 주신 것이라 이 재주를 자랑해 본 적이 없다.
나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세계적인 천재들을 접할 기회를 가졌다. 세상에는 각 분야에 수많은 천재와 천부적인 재주꾼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교만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나의 ‘잔재주’를 보고 나를 천재라고 부르지만 나는 천재와는 아주 거리가 멀다.
나는 어려서부터 어머님 덕분에 여러 분야를 배우고 터득한 숙련공 정도에 불과하다. 어머님은 항상 겸손하며 새로운 것을 배우고 쉬지 말고 공부하라고 말씀하셨다. 성경 말씀대로 항상 깨어 있으라는 것이다.
어머님이 가장 좋아 하시는 찬송가는 ‘예수사랑 하심은’ 이다. 그래서 돌아가신 후 “예수사랑 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가 묘비명이 되었다. 어렸을 적에 4복음서 중 한편을 외우면 5천원, 성경 1장을 외우면 5백원을 주셨다. 나는 그 덕택에 신구약 성경을 많이 암송할 수 있었다.
나의 학창시절에는 5백원이면 차비를 포함하여 한달은 거뜬히 쓸 수 있는 돈이었다. 말씀대로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였다. 나의 어린 시절은 이렇게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