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인’ 인생 차민수④] ‘바둑왕’ 조훈현과의 운명적 만남···’벗’ 이상의 ‘벗’
[아시아엔=차민수 드라마 ‘올인’ 실제 주인공, 강원관광대 석좌교수, <블랙잭 이길 수 있다> 저자] 내가 바둑을 좋아하여 관철동 한국기원으로 발을 들여놓기 시작하며 만난 김인 국수님과 고재희 사범님 그리고 정창영 사범님은 내게는 빼 놓을 수 없는 분들이다.
김인 국수님께는 인품을 배우게 되었고 자연히 친형님처럼 따랐다. 고 정창영 사범님께서는 나를 예뻐해 지도바둑을 많이 두어 주셨다. 나로서는 최고의 교수님을 만난 덕분에 프로에 입단할 수 있었다.
7살 때 도일(渡日) 하였던 조훈현이 일본에서 6단을 받고 스무살에 군대 입대를 위하여 귀국하였다. 아마도 73년 이었던 것 같다. 나는 당시 아마추어로 아마전국대회를 휩쓸고 있었다. 처음 만난 조훈현의 바둑은 그야말로 현란 그 자체였다. 한국에선 볼 수 없었던 스타일이었다.
정창영 7단께서 ‘한국의 면도날’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었지만 같은 스타일인 조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다. 조훈현 국수는 수도 빨리 읽고 정확하며 발도 빠르고 행마도 가벼웠다. 복싱의 알리 같은 스타일이었다.
얼마 되지 않아 조훈현 국수는 한국의 타이틀을 모조리 휩쓸고 전관왕에 오른다. 간간이 서봉수 명인이 한국 바둑의 자존심을 지켰지만 조의 적수로는 무언가 부족하였다. 조훈현은 자신이 연구한 창의적인 수를 두지만 서봉수는 남의 것을 공부하여 베껴다가 두는 바둑이었다. 창의력이 결여됐던 것이다. 조훈현의 바둑을 좋아했던 나는 서로 젊은 나이에 금방 단짝이 되었다. 조훈현은 한국어를 전혀 못했었다.
나는 74년 봄 프로입단 후 공군방위병으로 늦깎이로 군에 입대하며 조훈현과 다시 만나게 된다. 나는 서울 대방동 91기지 건설전대에, 조훈현은 수원 공군대학으로 배치되었다. 91기지 건설전대, 공군대학, 공군교재창, 공군사관학교의 4개 부대가 한 군데 모여 있었고, PX와 주보라는 군 식당이 몰려 있었다.
나는 바둑을 좋아하던 인사과장의 배려로 특과라는 PX에 근무하게 되었다. 매일 PX에서 내가 집에서 싸온 점심식사를 같이하며 바둑을 두었다. 당시 1급 바둑을 두는 장교들만도 30명 넘게 근무하고 있었다. 점심시간이면 좁은 휴게실에서 먹을 것을 잔뜩 사주며 프로바둑 구경하는 재미에 그야말로 난리도 아니었다.
내가 만난 조훈현은 백년에 한번 나올까, 그런 기재(棋才)를 가진 친구다. 나는 그의 기재를 몹시 아끼고 사랑했다. 조훈현은 겸손하며 친밀감도 좋고 인간적인 친구다. 물론 싫어하는 사람은 아예 피하거나 상대하지 않고 말도 함께 섞으려고 하지 않는다. 한번도 장기 두는 것을 못 보았지만 옆에서 수를 이야기 하는 것을 들으면 장기도 프로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 국수의 타고난 재능은 범인인 나로서는 좇아갈 수 없는 경지에 있다. 그는 훗날 한국바둑의 중흥을 이룬다.
조 국수가 나보다 딱 한 가지 약한 것이 있었는데 포커였다. 그는 “포커는 컨트롤이 잘 안 된다”며 포커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조훈현은 또 다른 게임은 나보다 잘 하지만
‘저스트 메이드’라는 카드게임은 나에게 못 당했다.
카드 13장을 받아 자기가 부른 점수를 가져와야 되는 게임인데 패가 좋은 사람이 칼자루를 쥐고 점수가 많은 사람을 메이드 못하게 하는 게임이다. 나온 카드 무늬와 숫자를 정확하게 외우고 있어야 하는 게임이어서 기억력이 좋은 조 국수가 제일 잘 한다. 나는 늘 조 국수가 점수가 적은데도 조국수를 물 먹인다. 조 국수는 점수가 적은 자기를 죽였다고 열 받아 한다. 나는 “자네가 그 무늬를 가졌었는지 몰랐다”고 둘러댄다. 그는 내가 알면서도 일부러 그렇게 하였는지 알고 있었다. 둘이서는 너무나 친한 까닭에 내가 그렇게 골탕도 가끔 먹이고 약도 올리지만 나에게만은 그냥 웃어 넘겨준다. 조훈현은 나에게 그냥 한없이 좋고 고마운 친구다.
1989년 조훈현과 중국의 섭위평 9단이 응창기배 결승전에서 만난 적이 있다. 당시 한국은 바둑의 변방에 불과하여 한국에선 조훈현 한 사람만 출전권을 얻었다. 중국은 섭위평이 日-中 양국의 자존심이 걸린 교류전에서 전승을 거두고 있었다. 섭위평이 ‘중국의 수문장’이란 별명을 얻으며 일본의 수많은 최고수들을 격파하여 세계에 이름을 떨치고 있을 때였다.
세계 바둑계는 모두 섭위평의 우승을 점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미국에 사는 중국인들은 내기를 제안하는 이가 많았다. 나는 홀로 조훈현의 우세를 점쳤다. 나는 당시 두 사람의 실력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막상막하이지만 40만달러라는 거금이 걸린 경우에는 조훈현이 유리하다고 봤다. 조훈현은 승부근성이 강하고 수많은 타이틀전의 승부를 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반면 섭위평은 사회주의 특성상 거금을 놓고 겨루는 승부경험이 없었다.
결국 중국 친구들은 섭위평에 걸고, 나는 조훈현에게 5000달러씩 걸었다. 결국 나의 예상이 적중했다. 2승1패로 뒤져 있던 승부가 조훈현의 반격으로 2승2패 막판까지 가는 아슬아슬한 승부에서 강심장인 조훈현이 승리한 것이다.
인구 5000만의 한국대표가 바둑의 본고장 14억 인구의 중국대표를 이긴 것이다. 그것도 바둑이란 최고의 창의력을 요하는 대결에서 이겼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다. 나는 이렇게 승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곧잘 알아맞히곤 한다. 세심한 관찰과 프로로서의 냉정한 판단이 나의 강점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