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왕 조훈현과 ‘톱 갬블러’ 차민수의 40년 우정

1990년 베이징 이화원에서 차민수(왼쪽)와 조훈현

“나는 바둑판을, 차민수는 도박판을 떠날 수 없었다”

[아시아엔=이상기 기자] 30대 이상 성인들은 2003년 벽두부터 봄, 안방극장을 뜨겁게 달군 sbs드라마 <올인>을 또렷이 기억할 것이다. 이병헌과 송혜교가 주연한 이 드라마는 톱 갬블러 차민수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리고 있다. 강원관광대 석좌교수인 차민수씨가 <아시아엔>에 연재하고 있는 ‘올인 인생 차민수’는 잔잔한 감동과 극적인 반전을 전해주고 있다.

차 교수의 자전적 시리즈 가운데 ‘바둑왕 조훈현과의 운명적 만남’이 있다. 이를 읽고 조훈현은 차민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했다. 그러다 조훈현이 재작년 펴낸 책을 발견했다. <조훈현, 고수의 생각법>이다. ‘생각은 반드시 답을 찾는다’는 부제가 붙은 이 책에서 조훈현 국수는 차민수를 어떻게 표현했을까?

전문 그대로 옮긴다.

대부분 사람들은 불평만 한다. 하지만 소수의 용기 있는 사람들은 그 벽을 뛰어넘어 높이 올라간다. 더 이상 누구도 부러워할 필요가 없는 당당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내 주변에 그런 인물을 찾자면 수 없이 많지만, 그 중 가장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사람은 차민수일 것이다.

드라마 올인의 모델로도 잘 알려진 차민수는 내가 일본에서 귀국해서 기원에서 만난 친구다. 말이 서툴러 수줍어하던 나와 달리 차민수는 멋진 외모만큼이나 당당하고 누구에게나 말을 잘 걸고 잘 웃는 멋진 청년이었다. 당시 그는 입단 전이었지만 이미 프로를 위협할 정도의 아마강자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영등포기원에서 차민수에게 당해보지 않은 프로가 없을 지경이었다. 우리가 본격적으로 친해진 건 군대에서 재회했을 때부터였다. 일본에서 귀국한 후 육군에서 불러주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나는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어서 공군에 자원입대했다.

처음에는 성남비행장에서 근무하다가 대방동 공군대학교 교수부로 옮겼는데, 그곳 피엑스(PX)에는 차민수가 근무하고 있었다. 차민수는 이미 장교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았다. 입단한 지 몇 개월 밖에 되지 않은 놈인데 장교들을 다 굴복시켰다며, 고참들이 나에게 혼 구멍을 내주라는 특명을 내렸다. 그렇게 비밀병기로 차출되어 차민수를 다시 만났는데, 그날 나는 보기 좋게 1집차로 패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기세가 대단했다. 6단인 내 앞에서도 전혀 쫄지를 않았다.

그날부터 우리는 가끔 얼굴을 볼 수 있을 때마다 바둑을 두었다. 얼마 후부터 나는 군인의 신분으로 대회에 참가할 수 있었는데, 군대에서 차민수와 두었던 100여 판의 초속기 대국이 큰 힘이 되었다.

나는 차민수가 전역하면 곧 바로 대회에 출전하여 돌풍을 일으킬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정말 뭐 하나 모자란 게 없는 친구였다. 잘생긴 외모에 유복한 집안에 타고난 재주까지, 그는 바둑뿐 아니라 수영, 탁구 등 운동도 잘하고 심지어 피아노나 바이올린 까지도 연주할 줄 알았다. 그 좋은 머리로 뭐든 시작하면 스펀지처럼 빨아들이고 게임하듯이 정복했다. 그런데 그의 열정을 펼치기에는 바둑판이 너무 좁았던 것일까?

그는 전역하자마자 미국이민이라는 예상 밖의 선택을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전문 겜블러라는 또 다른 꿈과 마주했다. 그는 피나게 노력하여 겜블러로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한때는 1년 수입이 4백만 달러에 육박했다고 하니 엄청난 성공을 거둔 것이다. 허지만 그 사이에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가 겜블러로 승승장구할 무렵 나는 창호에게 거의 모든 타이틀을 다 내어 주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미국에 가서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대저택에서 아내와 아이들과 행복한 모습으로 살고 있었다.

여전히 내가 기억하는 차민수의 당당하고 자신만만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얘기를 나누던 중 그가 눈시울을 붉혔다. 첫 결혼에 실패하고 전 재산을 위자료로 넘겨주고 아이들과 생이별을 해야 했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였다. 빈털터리로 한국에 와서 반년가까이 허름한 여관에서 지내며 밑바닥 인생을 살았던 이야기가 봇물 터지듯 흘러나왔다.

“사람의 몸에 수분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어, 하루 종일 울었는데 눈물이 마르지 않고 펑펑 나오더라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을 때 그의 수중에는 단돈 18달러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는 20달러 내기 바둑으로 열심히 돈을 모았다. 그래서 목돈 1600달러가 생기자 카지노로 달려갔다.

그의 진짜 승부는 바로 이때부터 시작 되었다고 한다.

그는 다시 살고 싶어서 이를 악물고 겜블을 했고 조금씩 희망을 찾게 되었다. 이제 차민수는 한국에서 프로기사로 활약하면서 바둑팀 감독으로도 뛰고 여전히 카지노 관련일도 하고 있는 전천후 인물이다. 이제는 만인이 그의 성공을 부러워한다. 하지만 그가 지금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련을 이겨야했는지를 사람들은 잊어버리곤 한다.

나는 차민수에게 그렇게 힘들었던 시절을 어떻게 딛고 일어설 수 있었는지를 물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잘 생각해 보니까 최악은 아니더라고, 모든 것을 잃긴 했지만 그래도 신체도 건강하고 도박판에서 굴러먹을 재주도 있고, 여전히 나를 믿어주는 사람도 있고, 얼마든지 다시 일어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실패만 바라보면 죽고 싶은 심정뿐이었지만 멀찍이 떨어져서 내가 처한 상황을 바라보니 아직 승산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더 악착같이 덤볐지”

나는 즉시 그를 이해했다. 그건 당시 나의 마음 상태와도 똑 같았기 때문이었다. 타이틀을 잃기는 했지만 손가락이 부러진 것도 아니고 심각한 뇌손상을 입은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지킬 것이 없으니 편안한 마음으로 바둑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인생은 원래 이런 것이다. 다 가졌다가 다 잃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한탄하고 절망한다면 승부는 거기에서 끝난다. 그러나 계속하여 게임을 할 의지가 있다면 승부는 계속된다.

차민수와 나도, 우리는 거기서 그만 둘 수가 없었다. 나는 바둑판이었고 그는 도박판이었지만 우리는 그 판을 떠나지 않았다. 만신창이가 된 몸일지라도 계속 싸우기로 결심하였고 조금씩 헤쳐 나갔다. 그만큼 우리는 각자가 속한 세상을 사랑했다. 우리는 모두 세상이라는 거대한 바둑판 위에 서 있다. 돌을 던지고 나가는 순간에 게임은 끝난다. 그러나 우리에겐 보여주지 못한 수많은 가능성이 아직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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