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인’ 인생 차민수⑦] 가장 행복했던 ‘결혼’과 12년만에 찾아온 ‘이혼’

[아시아엔=차민수 드라마 ‘올인’ 실제주인공, 강원관광대 석좌교수, <블랙잭 이길 수 있다> 저자] 나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학생의 신분으로 1972년 결혼에 성공하였다. 결혼하는 날은 이 세상이 그야말로 내 것만 같았다. 세상이 나를 축복해 주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 같았다. 아이도 둘 낳았다. ‘석진’이와 ‘영은’이다. 

1976년 공군 복무를 마친 후 어머님 성화로 도미(渡美)하게 되었다. 친구를 좋아하고 바둑을 좋아하던 나로서는 한국을 떠날 이유가 없었다. 그런 내가 어머님 눈에는 마음에 안 차셨을 것이다. 미국에 작은누나의 결혼식 때 다녀오신 후로는 더더욱 그랬다. 미국의 젊은이들이 성실하고 열심히 사는 것을 보신 후에는 나도 기회의 나라인 미국에서 새 세상을 개척하며 살기를 바라셨다.

나는 미국에 가면 운동을 특기삼아 CIA에 들어가려고 참으로 열심히 운동을 했다. 아침 5시에 일어나서 영하 20도가 넘는 그 추운 겨울에도 도장으로 가서 운동을 하였다. 난방도 안 되어 있는 도장에서 처음에는 몸이 떨려 움직이는 것도 힘들지만 발차기와 기본자세 연습을 하고 나면 땀이 비 오듯 하였다. 나중에는 도복이 흠뻑 젖어 도복을 짜야만 하였으니 정말 열심히 운동하였던 것 같다.

나의 소림쿵푸 사범은 송기천 사범님으로 후에 목사님이 되셨고 현재도 영등포에서 목회와 도장을 하고 계시다. 나는 당시 열풍이던 007영화에 매료되어 어머님 제안을 받아 들여 미국행을 택하게 된다. 주인공이 너무나 멋지게 보여 나도 세계를 돌아다니며 저렇게 한번 살아보고 싶었다. 미국 도착 후 생활은 그럴 만큼 여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당장 나가서 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네식구의 호구지책부터 해결하여야만 하였다.

나의 꿈은 점점 멀어지고만 있었다. 언어의 장벽 또한 만만치가 않았다. 라스베이거스를 보고난 이후에는 생각이 180도로 바뀌어버렸다. 내가 처음 본 라스베이거스는 충격 그 자체였다. 큰 산을 하나 더 넘어야 라스베이거스의 전경이 들어오는데 라스베이거스 쪽의 하늘은 불타는 듯 빨갛게 보였다.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의 날처럼 라스베이거스가 심판받아 불타고 있다고 생각하며 달려갔다.

그러나 마지막 산을 넘고 보니 하늘에는 연기가 없었다. 큰불이 났다면 하늘에 연기가 가득해야 하는데 연기는 보이지 않았다. 온통 백열등의 불빛과 열기로 가득했다. 내 눈 앞에는 불야성이 펼쳐져 있었다. 내가 본 라스베이거스는 나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다. 당시 한국에서는 길거리에서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하고 전력난이 심하여 당국의 지시로 가로등은 물론 극장 네온사인도 켤 수가 없었다. 나는 황금의 보고인 서비스산업 즉 카지노쪽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마음 속에 품게 됐다.

이혼의 아픔과 아이들과의 재회

차민수씨의 남매 석진과 영은의 어린 시절 모습. 차씨는 “우리의 후대가 지금보다 행복하고 건강하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게 나의 가장 중요한 삶의 목표”라고 말한다.

1984년 어느 날 집에 들어가는데 열쇠가 맞지 않았다. 아이들이 열쇠를 잊어버려 바꾸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뀐 열쇠를 내게 주지 않았다. 그건 나가달라는 뜻인 것 같았다. 이것이 12년 결혼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나는 금방 알게 되었다.

미국은 엄마에게 양육권이 우선적으로 주어지기 된다. 아이들을 자기가 키우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를 여자 혼자 키우려면 돈이 있어야 하니 재산은 당신이 다 가지라 하고 호기를 부리고 나왔는데 나의 주머니에는 달랑 2달러뿐이었다.

나는 이렇게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여자에게 버림을 받았다. 서로는 성격차이를 극복하지 못하였고, 서로 너무 어렸던 것 같다.

이혼 당한지 3년째인 1986년 나는 포커세계에서 극적인 성공을 거두게 된다. 갑자기 아이들이 보고 싶은 생각에 머리가 진공상태로 변하는 것을 자주 느끼게 되었다. 나는 아이들이 산호세 인근에 사는 정도로만 알고 비행기를 타고 무작정 찾아 나섰다. 이집 저집 우편함의 이름을 확인하고 있었지만 서울서 김서방 찾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나는 이렇게 단순하고 무지한 사람이다.

순간의 행운이라고 할까, 내 아들 또래의 학생 무리가 한 집으로부터 나오고 있었다. 얼른 달려가 “혹시 에디 차라고 아느냐”고 묻자 자기학교 친구라고 하며 누구냐고 되묻는다. LA에서 온 친척이라고 이야기하니 친절하게 이 동네가 아니라면서 자기차를 따라오란다. 10여분 정도를 운전하여 다른 동네에 도착한 후 문을 두드리니 이미 처녀가 다 된 딸 샌디가 나를 보더니 곧바로 울어버린다. 서로 끌어안고 한참을 울자 안내해 주었던 친구들은 어안이 벙벙하여 딸아이에게 묻는다. “Are you OK?”

딸아이가 엄마에게 전화를 하자 백화점 옷 매장에서 매니저로 일하고 있던 아이 엄마가 곧 온다고 한다. 얼마를 기다렸을까? 기다리던 집사람은 오지 않고 처형께서 오셨다. 첫마디가 “그동안 아이들 양육비 한푼을 보내지 않은 사람이 무슨 낯으로 왔느냐?”다. 사실 당시 나는 주소도 전화번호도 몰랐다.

나는 슬그머니 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놓았다. 그 안에는 그동안 못 보내 3년간 밀렸던 양육비가 들어있었다. “누님!” 나는 처형을 꼭 누님이라고 불렀다. “누님, 오늘 지난 일로 싸우러 온 것이 아닙니다. 내가 자리를 잡아 이제는 도와줄 수가 있습니다. 내 아이들이 구차하게 사는 것은 원하지 않으니 얼마의 생활비를 보내주면 좋겠는지 알기 위하여 왔습니다.” 내가 말하자 금방 표정이 밝아졌다. 하지만 아이엄마는 그날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저녁식사를 같이하며 “나는 지난 일에 연연하지 않으며 아이들을 주기적으로 보았으면 좋겠고 한두 달에 한번 정도나 방학을 이용하여 데려갔으면 한다”고 하니 처형은 좋다고 하신다.

천신만고 끝에 아이들과의 재회는 이루어졌고 아이엄마 하고도 그날 저녁 통화하게 되었다. 드디어 내 마음에 진정한 평안이 찾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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