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뜨락] 정호승 ‘그는’ 그리고 아무개의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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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엔=김창수 시인, 한빛고교 교장 역임] 문학과 예술이 감성에 기반하여 삶의 풍요로움을 꿈꾼다면 과학과 철학은 이성을 토대로 문명의 진보를 꿈꾼다. 그리고 영성은 이성과 초이성을 영역으로 하여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다. 아래 시를 보면 시인과 수행자의 차이를 금방 알 수 있다. 시인은 존재와 사유, 관계와 과정에 있어서 깊게 보는 사람이다. 시는 인문적 가치를 강조하는 문학 양식이기 때문에, 시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읽는다. 그러나 시인은 자아를 내려놓지 못한다.

장자에 ‘적막대 어덕유심(賊莫大於德有心)’이라 는 말이 나온다. 유심으로 덕을 베푸는 것보다 더 큰 적은 없다는 뜻이다. 수많은 경전들 말씀도 장자나 노자와 다르지 않다. 시인만큼의 감성으로 사람과 자연을 대하는 것도 훌륭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높고 깊은 마음으로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이 경전들의 가르침이고 지금은 그것이 요청되는 시대다.

 

그 는

정호승

그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

조용히 나의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도 나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때

묵묵히 무릎을 꿇고

나를 위해 울며 기도하던 사람이었다.

내가 내 더러운 운명의 길가에 서성대다가

드디어 죽음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

그는 가만히 내 곁에 누워 나의 죽음이 된 사람이었다.

아무도 나의 주검을 씻어 주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 촛불을 끄고 돌아가 버렸을 때

그는 고요히 바다가 되어 씻어 준 사람이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자를 사랑하는

기다리기 전에 이미 나를 사랑하고

사랑하기 전에 이미 나를 기다린.

같은 시를 조금 바꾸면 수행자의 시가 된다.

 

나 ?는

아무개

아무도 그를 사랑하지 않을 때

나는 조용히 그의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왔다

아무도 그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때도

나는 묵묵히 무릎을 꿇고

그를 위해 기도하였다

그가 그의 험난한 운명의 길가에 서성대다가

드디어 죽음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

나는 가만히 그의 곁에 누워 그의 죽음이 되어 주었다

아무도 그의 주검을 씻어 주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 촛불을 끄고 돌아가 버렸을 때

나는 고요히 바다가 되어 그를 씻어 주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은 자를 사랑하는

기다리기 전에 이미 그를 사랑하고

사랑하기 전에 이미 그를 기다리는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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